[人터뷰] 손덕준 인천화교협회장 “화교, 韓 다문화 사회 시초…포용·보존돼야”

2017-08-03 13:02

손덕준 인천화교협회장[사진=김봉철 기자 nicebong@]

손덕준 인천화교협회장(61·사진)은 “화교는 한국 다문화사회의 시초이고 그런 측면에서 포용하고 보존해야 될 가치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손 회장은 아주차이나와의 인터뷰에서 “중국과 한국 양쪽에서 모두 외국인 취급을 받을 때는 서럽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결혼해 정착했다. 이른바 ‘구(舊)화교’라고 분류되는 화교 3세다. 손 회장은 “우리는 김치 없으면 밥 못 먹는 엄연한 한국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오히려 한국인들이 외국인 취급을 해 불편할 때가 많다”고 전했다.

그는 “인천 화교인들이 대만 국적을 가진 외국인인 것은 맞지만, 납세의 의무와 투표 권리를 가진 엄연한 인천시민”이라며 “우리의 고향은 인천이지,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손 회장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1945년 해방 직전 중국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에서 인천차이나타운으로 건너와 무역업과 요식업에 종사했다.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자금성, 태화원 등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는 손 회장은 그의 자녀, 손주까지 5대째 인천에 살고 있다. 아들은 4대째 가업을 이어 받아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손 회장의 부인, 사위, 며느리는 모두 한국인이다.

손 회장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촉발된 한·중 관계에 대해서도 우려감을 나타냈다.

그는 “절친했던 중국 친구들도 냉담해진 것을 느낀다. 그들이 보기에는 우리는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 회장은 “중국인 관광객들은 한국에 와서 한국음식을 찾기 때문에 둘러만 보고 간다”면서 “원래 인천차이나타운은 요식업이 주를 이루고 있어 사드로 인한 타격은 크게 없었는데 이상하게 매출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일 급한 것은 지역경제가 살아나야 된다는 것”이라며 “사드 문제도 하루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덕준 인천화교협회장[사진=김봉철 기자 nicebong@]


손 회장은 “우리는 산둥성 출신인데 6·25전쟁 이후 공산당 국적으로는 살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대만 국적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런데 갑자기 1992년 중국과 수교가 체결돼 공중에 붕 뜨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한국에 많이 들어오는 조선족과 같은 입장인데 반대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면서 “처음에는 외국인이라 한국 부동산 취득도 못했다”고 당시 어려움을 회상했다.

손 회장은 “자꾸 화교들이 위축되고 없어졌다고 하는데 거의 귀화했다”면서 “이제 국적과 수치 자체는 의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1998년 7월에 IMF 사태 당시 외국인 부동산취득법이 완화되면서 많이 편해졌다. 영주권도 없어 거주권을 3년마다 연장했던 시절이었다”고 설명했다.

손 회장은 “이제는 귀하신청하려면 예약하고 줄을 서서 1년은 걸린다. 그만큼 대한민국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화교들의 귀화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해 8월, 임기 3년의 인천화교협회장직을 맡았다. 상가번영연합회 회장을 오래 맡아온 그였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손 회장은 회장직을 수락하게 된 이유를 묻자, ‘책임감’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인천 화교는 한국 화교의 모태”라면서 “어떤 형식으로든 명맥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천화교협회는 1887년 ‘중화회관’에서 시작한 화교자치조직이다. ‘중화상무총회’, ‘중화화상상회’, ‘중화상회’, ‘화교자치회’ 등을 수많은 이름을 거쳐 1960년 현재의 화교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초창기에는 말 그대로 화교 상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자치’ 역할을 주로 맡았지만, 지금은 출생·사망신고를 비롯한 각종 민원을 처리하는 ‘주민센터’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협회는 3800여명 회원이 매달 1000원의 회비를 걷어 운영되고 있다. 손 회장은 “아직도 인천 화교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면서 “인천 화교 역사를 알리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밝혔다.

인천광역시와 중구청을 분주하게 움직인 끝에 성과도 있었다. 지난해 11월, 인천 화교의 숙원사업이었던 화교인 전용 납골당이 인천시립장사시설인 인천가족공원 안에 문을 열었다.

인천 화교 묘역은 인천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세 차례나 이전하는 수난의 역사를 겪었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 제물포 일대에 치외법권지역인 청나라 조계가 설정되면서 중구 내동에 제공된 토지에 처음 화교 묘역이 조성됐다.

이후 일제강점기 시가지정비로 인해 남구 도화동으로 옮겨졌고, 남동구 만수동, 부평구 인천가족공원 등을 떠돌았다.

손 회장은 “내국인과 똑같이 대우를 받으려면 귀화를 하라는 말을 하는데 단순히 국적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인천 화교는 성실히 시민의 의무를 다하면서 대를 이어 정착해 살고 있다. 화교들도 노인, 장애인 복지가 절실하다”고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호소했다.

또한 협회 뒤에 위치한 옛 청국영사관 회의청을 보수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인천청국영사관 내 유일한 잔존건물인 회의청은 1910년에 건립돼 인천 차이나타운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손 회장은 “인천대와 함께 청국영사관 회의청을 복원할 예정”이라며 “만 65세 이상 전철 무료이용, 인천차이나타운 내 노인정 신설 등 시급한 현안도 차례대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