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초대석] 정연찬 서울시 인재개발원장 "시정만 바라보고 달려온 공직 30년 산증인"

2017-06-21 07:34
관선, 민선 모두 겪어… 전기버스 세계 최초로 실제 버스노선 투입

정연찬 서울시 인재개발원장이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0년 공직생활의 소회를 전하고 있다.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아주경제 강승훈 기자 = 1987년 제30회 행정고시 출신으로 올해 공직에 투신한 지 햇수로 꼭 31년째다. 공무원이 되고 서울시정만 바라보고 달려온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본인 의사와 상관 없이 자치구에 잠시 외유(?)를 떠났지만 결국은 본래 둥지로 돌아왔다. 그동안 관선과 민선을 통틀어 10명이 넘는 시장을 모셨다.

바로 정연찬 서울시 인재개발원장의 이야기다. 서울시의 진화 과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그야말로 산증인이라 불린다. 정 원장이 이달 말 평생 몸담았던 공직을 떠난다. 지금껏 달고 다녔던 지방공무원이란 꼬리표를 떼내는 것이다. 요즘 공공과 민간을 통틀어 우리사회 전반에서 정년을 맞이한다는 건 그야말로 아름다운 영예일 수 있다.

지난 16일 만난 정 원장의 얼굴에는 밝고 푸근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아직 보름가량 남아서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만큼 공직생활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었나 싶다"며 "과거 퇴직 선배들이 즐겨 인용했던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생각난다"고 소감을 밝혔다. 공인으로 무거운 책임감 및 의무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심적 평온함을 되찾을 때의 느낌과 업을 내려놓는 허전함이 교차한다고 덧붙였다.

◆ 전기버스 세계 첫 실제 버스노선에 투입한 주인공

돌이켜보면 일 속에 파묻혀 지낸 것 같다는 정 원장이 그간 이뤄낸 결실들은 모두 나열하기 힘들 정도록 수두룩하다. 버스 개혁 이전인 1996년 '고통국'이라고 불렸던 교통국 내 대중교통과 운수행정팀장으로 근무할 당시 프랑스에서 개발한 버스카드를 서울시에 처음 도입했다. 그렇게 8년이 흐른 2004년에 '버스 준공영제'라는 서울시 버스 개혁 실행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정연찬 원장은 "국가의 녹을 먹는 공직자는 추진 중인 정책이나 사업들이 시민과 국가사회로부터 호평 받아 지속성 있게 이어지면 무한 자긍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2009년 경제진흥관 당시 큰 성공을 거둬 국내에 '창업 열풍'을 몰고온 '2030 청년창업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열정과 아이디어는 가졌지만 자금 부족이나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20~30대 예비 창업자를 선발해 청년 CEO로 키워냈다. 시행 6개월 만에 342명이 창업에 성공했고, 259건의 특허 등록·출원 및 210명 고용을 이끌었다. 전국 지자체 중 처음 시도했는데, 기획에서 실행까지 전 과정을 정 원장이 주도했다. 

반면 2011년 세계 최초로 실제 버스노선에 투입된 남산의 전기버스와 관련해선 아쉬움이 크다. 이 성과는 그해 5월 브라질 상파울루시에서 열린 'C40 세계도시 기후정상회의(C40 Large Cities Climate Summit)' 친환경 교통정책 모범사례로 전파됐다. 글로벌 도시들이 기후변화에 차츰 관심을 높이던 시절, 서울시는 남산 순환도로에서 이미 9대의 전기버스를 운영 중이었다.

정 원장은 "당초 시내버스를 점차 교체해 향후 3~4년에 걸쳐 300대로 늘리는 확대계획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진척되지 못했고 중국으로 관련 산업의 주도권이 빠르게 옮겨갔다"면서 "미세먼지, 황사 등 환경오염이 부각되고 있는 현재의 여건이었다면 실행 가능성도 컸겠지만 과거엔 그 동력이 충분치 않았던 듯싶다"고 회상했다.

◆ 인부 7명 사망 '노량진 배수지 사고' 안타까워

정연찬 원장에겐 아직도 또렷이 떠오르는 5년 전의 한 사고가 있다. 2013년 7월 15일 오후 작업인부 7명이 숨진 '노량진 배수지 수몰 참사'가 그것이다. 암사정수센터에서 노량진배수지로 공급하는 상수도관 이중화부설 공사 중 터진 차단막을 통해 강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아까운 목숨이 희생됐다. 재판에 넘겨진 서울시 관계자들은 전원 무죄로 일단락됐지만 공사 발주처인 탓에 여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때 정 원장이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장으로 있었다. 거듭 돌아가신 분들의 영령에 죄송스럽다는 말을 전한 정 원장은 "기상 전망이 폭우가 예고됐던 터라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고, 사고 전날에도 공사장 간부들의 내부 연락망으로 홍수에 철저히 대비할 것을 주문했다"면서 "사고 당일엔 담당 주무관이 실시간 수위를 확인하며 감리단장, 현장소장 등과 유선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했다.
 
앞서 배수지 지하에 터널을 뚫고, 상수도관을 묻는 공정은 모두 마무리된 터라 서울시가 보고받을 내용도 없었다. 특히 전면책임감리제로 이뤄져 시공사와 감리업체에 책임이나 권한 등 모든 역할이 넘겨진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서울시는 공사 과정에 일절 관여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날 시공사 측은 물 높이가 꾸준히 늘어나는 것을 알고서도 현장에 작업자를 투입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그곳에 배치됐던 굴착기계를 다른 장소로 옮기려 무리하게 일정을 강행했고, 결과적으로 7명의 사망자를 냈다. 서울시 측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뒤늦게 내용을 파악했지만, 비난의 화살은 한창 쏟아지고 있었다.

정 원장은 "전적으로 누구의 탓이라고 돌릴 수 없지만 나 자신에게도 많은 정신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안전과 관련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항상 공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안전문제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강조했다. 또 전면책임제의 공사장이라도 안전에 관한 사항은 공공부문이 직접 관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불합리적인 제도 개선에는 적극 목소리를 내왔다.

◆ 지방자치 최일선 동작구 부구청장 알찬 경험

정 원장은 '노량진 참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2013년 8월까지 8개월이란 짧은 상수도사업본부 근무를 마쳤다. 그리고 1년가량 시 산하기관에 파견을 떠났다가 2014년 7월 동작구 부구청장으로 돌아왔다. 2년6개월 동안의 부구청장 경험은 서울시 본청에서 닦았던 지식을 구현하고 지역발전의 모습을 나날이 느낄 수 있는 시기였다고 자평했다. 정 원장은 "거버넌스를 통한 주민들의 활발한 구정 참여 및 전문가 수준의 식견들은 밝은 지방자치 미래상을 보여줬다"고 소개했다.

그럼에도 대도시 자치구청장이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이 연간 100억원도 채 안 되는 열악한 재정 현실엔 안타까움을 표했다. 동작구의 경우 2016년 기준으로 인구 40만여명에 재정자립도는 28% 수준이다. 한 해 예산은 약 4200억원이고, 대도시 서울의 자치구란 이유로 국고보조금이나 교부세 등이 사실상 내려오지 않아 살림살이가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다. 중앙이나 지방정부와 매칭으로도 사업을 벌이기 쉽지 않다.

정 원장은 성년을 훌쩍 넘긴 우리나라 지방자치 발전에 지역주민들 간의 정치적 갈등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예컨대 2006년 지방선거부터 전면 도입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를 들었다. 간략히 선거 과정에서 후보자를 따라 서로의 등을 돌린 마을구성원들이 분열되고 심지어 갈등으로 확산된다는 것이다. 지금 사회에서 요구하는 협치와 어울리지 않아 서둘러 수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정 원장은 주경야독으로 50대 중반의 나이에 늦깎이 공학박사가 됐고, 이제 후학 양성에 매진코자 한다. 우선 대학의 강단에서 그동안 익혔던 행정지식을 전달할 예정이다. 아울러 공직부문에서의 여러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관계들, 즉 중앙·지방정부 간 그리고 광역·기초자치단체 간 비능률적인 제도들을 찾아 개선하는 연구활동에 나설 생각이다.

정 원장은 "전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행정환경 역시 우리가 느끼는 그 이상으로 급변한다"며 "시민과 국가사회를 위한 행정이 효과적으로 펼쳐지려면 공직자 자신들도 끊임 없는 학습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지식 및 이론 습득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 정연찬 서울시 인재개발원장은 누구

국립철도고교를 나와 동국대에서 행정학사 과정을 졸업했다. 제30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1987년 5월 서울시와 첫 인연을 맺었다. 10년 뒤인 1997년 지방서기관으로 승진한 뒤 버스과장, 보육지원과장, 감사담당관, 교통계획과장 등을 역임했다. 2000~2002년 영국 리즈대학교로 해외훈련을 떠나 교통기획학과 이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3년 8월 서울시립대 대학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8~2010년 서울시 경제진흥관(산업경제기획관 전신) △2011년 1~12월 서울시 맑은환경본부장 △2013년 1~8월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장 △2014~2016년 동작구 부구청장 등을 지냈다. 앞서 2010년 1월 2급(지방이사관)에 올랐지만 2014년 7월 동작구로 자리를 옮기며 직급이 한 단계 낮아졌고, 올해 3월 환원됐다. 1993년과 2005년 각각 국무총리표창, 녹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정연찬 서울시 인재개발원장이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0년 공직생활의 소회를 전하고 있다.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