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칼럼] 잘 알려지지 않은 아르헨티나의 저력
2017-05-08 17:29
사장의 안내를 받아 시트루스빌(Citrusvil)사 레몬가공 공장 내부로 들어서니 노란색 레몬과일이 컨베이어 벨트와 도르래를 따라 길게 움직이고 있고 흰색 작업복의 인부들도 듬성듬성 보인다.
공장 바닥이 깨끗하여 윤이 날 정도다. 모든 공정이 자동화되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기계가 모두 스페인 또는 이탈리아 산이다. 세계 최대 레몬 생산 지역인 투쿠만(Tucuman) 주(州)에 위치한 이 공장은 아르헨티나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라고 한다.
연간 30만t 레몬을 선별하여 포장하고 일부는 가공하여 레몬 오일과 주스를 생산한다. 레몬껍질도 건조하여 젤라틴 원료로 사용한다. 가공과정에서 버리는 게 하나도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 위치한 비오헤네시스 바고(Biogenesis Bago) 사를 방문했다. 고객 중 한 명인 한국의 대사가 방문한다고 하니 지주회사인 바고의 사장도 나타났다.
비오헤네시스는 중남미 최대 구제역 백신 생산기업으로 연간 2억회 접종이 가능한 백신을 생산한다. 햄스터의 콩팥을 사용하여 백신바이러스를 배양한다고 한다.
안내자는 오염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서 유리벽을 통해서만 시설을 보라고 한다. 보안에 더 신경쓰는 눈치다. 이 기업은 중남미 여러 곳에 자회사를 두고 있고 한국, 대만 및 베트남에도 현지 유통업체를 설립했다.
지난해에는 중국 산시성에 현지기업과 합작으로 연간 4억회 접종이 가능한 백신 생산시설을 설립하였다. 비오헤네시스는 750명 직원으로 연간 1억 달러 매출액을 기록한다. 아르헨티나의 저력을 보여주는 알짜기업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INVAP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흐뭇한 모습으로 집중한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자존감을 세워주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INVAP는 1976년 바릴로체 시에 설립된 첨단기업으로 연구 및 의료용 원자로, 기상 및 통신위성, 풍력터빈, 레이더 등을 생산한다.
1330명의 직원 중 85%가 연구 인력이며, 연간 매출액이 2억 달러나 된다. INVAP는 2개의 정지궤도 통신위성(Arsat-1, 2호)을 제작하여 2014년과 그 이듬해에 각각 발사하였다.
이미 5개의 기상예보 및 과학연구 위성을 제작했고 지금도 2개를 추가로 만들고 있다. 알제리·이집트·호주 등에 연구용 원자로를 수출하기도 했고, 우리나라의 스마트 원자로와 유사한 소규모 발전용 원자로를 지금 개발 중이다. 아르헨티나는 원자력분야에서 우리와 경쟁국인 동시에 협력대상국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서 남서쪽으로 1100㎞ 떨어진 네우켄(Neuquen) 주(州)는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지로 유명하다. 그곳에 세계 최대의 중수(重水) 생산시설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네우켄 시에서 1시간여 허허벌판 사막지대를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리마이(Limay) 강가에 정유공장 모습의 시설이 나타나는데, 바로 네우켄 엔지니어링서비스(ENSI)로 알려진 중수생산 공기업이다.
그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석유화학 기업들에 대한 엔지니어링 서비스도 한다. D2O라는 화학기호를 사용하는 중수는 7000ℓ의 물에서 1ℓ가 생산되며 일반 물보다 20% 더 무겁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안정적인 원자력발전을 위해 정치적 민감성을 지닌 농축우라늄보다는 천연우라늄을 사용하는 중수로를 선택하였고, 1989년부터 중수를 자체 공급하고 있다. ENSI는 현재 연간 200t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국내공급뿐만 아니라 독일·미국·스위스·프랑스·노르웨이·호주 등으로 이를 수출하고 있다.
한국에도 105t을 수출했다고 한다. 현재 중수는 1ℓ당 800~1000달러에 거래된다. ENSI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물을 제조하는 아르헨티나의 첨단기업이다.
아르헨티나는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팜파스(Pampas) 평원을 보유한 농업대국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진면목을 알고 이해하려면 발품만큼 좋은 게 없다.
아르헨티나에서 머무는 시간과 발품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그 저력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