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열의 행복한 경제] ‘유능한 진보’의 길

2017-05-04 06:30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대우)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대우)


그는 ‘재벌개혁’에 관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벌개혁을 어렵게 접근하지 말고 ‘특경가법’(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강화처럼 훨씬 쉽고 효과적으로 풀어보자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2012년 2월 칼럼 제목은 ‘재벌개혁과 특경가법’이다. 2012년 대선에 나선 여야 후보들이 재벌개혁을 공약하고 있던 상황에서 재벌총수들의 ‘회삿돈 빼돌리기’(횡령, 배임)에 대한 형량을 ‘재산의 국외도피’와 비슷하게 강화하자는 주장이었다. 즉 횡령금액이 50억원 이상일 경우 ‘징역 5년 이상’을 ‘10년 이상’으로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야 ‘집행유예’와 같은 솜방망이 처벌이 어려워지고, 재벌들의 경영이 투명해지고, 재벌의 세습독재와 국정농단 행태에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는 얘기였다.

비교적 쉬운 일부터 착수해보자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제안이었다. 2017년 5월 현재 이 법 조항이 바뀌었는지 확인해봤다. 5년 전에 비해 달라진 게 없다. 그대로다.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가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공약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국민들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재벌개혁’은 ‘국정과제 우선순위’에서 거의 꼴찌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구색 맞추기 공약으로 치부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5년 전 그의 칼럼에 나오는 ‘재벌개혁의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찌른다.

대기업 근로자가 성직자가 아닌 바에야 중소기업 근로자와의 임금격차 완화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임금 인상을 양보하겠나? 그는 사회적 대타협이나 대기업 근로자의 양보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차원에서 정부의 사회복지 강화가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사회복지 강화를 통해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실질적 생활수준과 사회적 임금을 보완해주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자본측면에서 재벌개혁에 오랫동안 천착한 만큼, 노동측면에서도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노동귀족적 행태도 비판해 왔다. 이로 인해 진보 쪽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북한체제를 ‘김씨 왕조’라고 부르며 봉건적 성격과 문화적 후진성을 비판한 것처럼 그에게 성역은 없었다. 진보가 다 개혁적인 것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단순한 구분을 넘어서 개혁적 진보, 수구적 진보, 개혁적 보수, 수구적 보수로 세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소개하면 그가 매우 깐깐한 원칙주의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너그럽기도 하고 따듯하기도 하다. 배려도 넘친다. 남북관계를 북한에서는 북남관계라고 부르는데, 북한에 비해 훨씬 강자인 우리가 먼저 ‘북남관계’로 불러주자는 제안도 했다.

그는 “재벌 문제는 당장 정답이 있는 게 아니고 쉽게 풀릴 일도 아니지만, 기교를 부리지 말고 상식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있는 법부터 잘 지켜야 한다. 교수들부터 월급 이외의 다른 돈과 힘에 굽실거리지 말자”고 얘기하기도 했다.

“재벌로부터 정계, 관계, 언론계, 학계, 검찰이 넙죽넙죽 돈을 챙긴다. 이리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공범자 유력집단이 형성된다”고 일갈했다. 소위 지식인들과 엘리트집단의 직업윤리와 품위, 자긍심을 강조했다. 그만큼 그는 살아생전에 스스로 엄격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는 2014년 말에 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겨우 60을 넘겼다. 독일에서 동서독 통일과정을 연구하면서 남북 경제통합을 다음 연구과제로 하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지는 못하게 됐다. 하지만 그는 치열한 자기관리와 문제의식을 토대로 해법과 대안을 제시하는 ‘개혁적 진보’, ‘유능한 진보’의 길을 보여줬다. 돌직구를 날리는 ‘황야의 총잡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그의 따뜻한 인간미는 같은 연구자들과 선후배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만약 5월9일 이후 진보 정부가 출범한다면, 경제학자 김기원 유고집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를 일독할 것을 권한다. ‘유능한 진보 정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