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칼럼] 미녀와 야수에 투영된 우리 시대의 자화상

2017-03-28 00:01
에마 왓슨의 벨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일침

[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


실사판 영화인 '미녀와 야수'의 기세가 대단하다. 개봉 11일 만에 300만명 관객을 돌파했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겨울왕국'과 같은 기록이다. 전통적 비수기를 뚫고 역대 국내 3월 개봉 영화 중에서는 가장 빨리 300만명에 도달했다.

이 영화의 덕목은 많다. 엄청난 스케일과 화려한 CG는 원작 2D 애니메이션을 압도하며, 새롭게 추가된 뮤지컬 넘버와 강화된 캐릭터 때문에 현장감 넘치는 무대 공연도 따라가기 쉽지 않다.

영화가 시작되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순식간에 1991년으로 돌아가게 하는 향수의 힘은 그 좋았던 90년대를 기억하는 모두에게 위로를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영화의 힘은 강화된 캐릭터들에게서 발현된다. 에마 왓슨이 연기한 지적이고 주체적인 '벨'은 늑대하고 싸우다 부상당한 '야수'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그의 남성성에 감동하거나 모성애를 발동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내가 도울 수 있게 좀 일어나 볼래요?”라고 말하는 벨은 모성 결핍으로 비뚤어졌다며 일종의 어리광을 부려온 야수를 오히려 꾸짖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도, 도움을 베풀 때에도 동등한 인격 대 인격으로 야수를 대하는 벨의 자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난하니까, 환자니까, 위험에 처해 있으니까 약자임을 입증하라는 희한한 미국식 민주주의에 일침을 놓는다.

야수는 벨에게 한 수 배우고는 어리광을 내려놓고 진짜 사랑을 실천한다. 절대 고통을 피하지 않겠다고 노래하면서 벨을 놓아준 야수는 영원히 저주 속에 살 수도, 영원히 상실과 결핍의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는데도 담담히 그 삶을 받아들인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내가 고통을 받는다 해도 절대 피하면 안 되며, 그 고통을 남에게 떠넘겨서도 안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사랑을 입증하려고 하는 미국식 패권주의에 한 방을 먹인다.

영화로부터 사회를 읽어내게 하는 압도적 장면은 '가스통'이라는 퇴역 군인에 의해서 완성된다. 온갖 범죄가 생존의 이름 아래 용서되는 전장에서 인정받던 그는 세상이 전장이니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여자도 쟁취하려는 그는 전형적인 스토커와 여성 혐오자의 모습을 연출하다 장인을 늑대에게 먹이로 던져주기까지 한다. 그 범죄를 덮기 위해 공포를 조장하면서 야수와의 전쟁을 선동한다.

그의 이름이 가스통이란 것은 아재 개그에서 나오는 말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광장 한편에서 보았던 군복 입은 어르신들의 행진과 구호가 가스통 무리들의 행진으로 보였고, “야수를 죽여라”로 들렸던 것은 분명 기시감이었다.

가스통은 거기에만 있는 것일까? 민주화 운동이란 이름 아래 군사독재와 싸우던 시절에는 쇠파이프를 들고 경찰 버스를 불태우고도 개선 행진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선택만이 어떤 상황, 어떤 시대에도 올바른 방식인 건 아니라는 사실은 '미녀와 야수' 원작 애니메이션이 사랑받던 시절에 이미 깨닫지 않았나?

그런데, 26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런 방식을 고집해야 한다는 주장은 가스통의 선동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 것이며, 지금 실사판 '미녀와 야수'를 보는 세대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같은 당 안에서도 독설로 상대를 죽일 듯 공격하는 일이 난무하는 것을 보며, 청산과 화합을 이뤄낼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는 제안은 마법을 믿는다는 말과 같은 수준일까?

내가 좋아하는 리더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영화에서처럼 마법이 풀리듯 한꺼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영화에서도 이미 깨진 부부관계는 다시 좋아지지 않았다.

[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