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기획]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소녀들’ & 한일 관계

2017-02-28 01:21
10억엔 받고 자존심 넘긴 12·28합의… ‘소녀상'으로 틀어진 한·일관계
최종적 ‘불가역적’ 문구로 일본에 ‘법적책임’종료 빌미 줘
화해치유재단 ‘굴욕외교’ 논란 속 출연금 운영비로 써 빈축
일제 잔재 청산·日 과거사 반성 진행 중 대한독립은 멀었다

아주경제 강정숙 기자 = 3.1절이 98돌을 맞는다. 식민지 한국의 독립을 외쳤던 그날의 함성이 지금의 역사를 만들었다.

해방 이후부터 시작된 일제 잔재 청산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일본에 대해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과하라는 목소리는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일관계 논란의 중심에 지난 2015년 12월 28일 성사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7월 28일 오전 위안부 화해 치유 재단 현판식이 열리는 서울 중구 바비엥3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합의강행과 화해치유재단 설립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 12.28 합의의 민낯...화해치유재단의 '뻘짓' 도마에 올라

한일 양국이 맺은 '12.28' 합의는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것이어서 합의 당시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 정부는 해묵은 과제를 슬기롭게 해결한 양 선전했지만, 오히려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의 강제연행 사실을 부정하는 등 뜻밖의 태도를 보여 국민들을 당혹케 했다. 사실상 양국이 합의문에 대한 해석에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나 피해자들의 명예회복도 빠져 있었던 '12.28 합의'를 당시 피해 할머니들은 강도 높게 비판했고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는 '돈을 지급'하는 것으로 문제를 무마하고자 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실제 그 민낯은 화해치유재단의 운영을 통해 드러났다.

한일 위안부 합의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이 일본 정부 출연금 10억엔(우리돈 107억원) 중 일부를 재단 운영비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설립의 정당성은 물론 운영의 정당성마저 상실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부 관계자도 "올 들어 일본 정부 출연금을 재단 운영비로 사용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지난해 7월 재단 출범 이후 10억 엔 전액을 위안부 피해자 지원과 기념사업 목적으로만 사용하겠다던 정부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굴욕 외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12.28 합의의 산물인 일본 정부 출연금을 재단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

아울러 재단은 앞서 12.28 합의가 있은 후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 합의금을 받을 것을 종용한 것이 드러나면서 일본 정부에 대항해야 할 정부가 일본 정부를 대변하고 있다는 비난도 잇따르고 있다.
 

소녀상. [사진=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 우리 정부를 압박하는 日...일본을 대변하는 정부

소녀상 설치는 여전히 한일 양국 관계의 딜레마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말 부산 총영사관 앞에 소녀상이 설치된 데 대해 강력 반발해 지난달 9일 나가미네 주한 대사와 모리모토 야스히로(森本康敬) 부산 총영사를 일본으로 일시귀국시킨 뒤 현재까지 50일 가까이 귀임시키지 않고 있다.

이에 우리 정부가 외교부가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관할 지자체에 소녀상 이전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우리 외교부는 최근 부산시청과 부산 동구청, 부산시의회에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교훈을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로 옮기는 방안에 대해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공문을 전달한 바 있다.

특히 이전의 필요성으로 외교부는 "소녀상의 위치가 외교공관의 보호와 관련된 국제예양 및 관련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오히려 적반하장, 소녀상 철거 움직임으로 이어지는가를 지켜본 뒤 주한대사의 귀임 시기를 판단할 계획이라고 NHK가 26일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은 지난 24일 "한국 정부도 합의를 착실히 이행해 간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이전부터 표명해 왔다"며 "끈질기게 한일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요구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의 공문 발송은 당장의 소녀상 이전을 염두에 뒀다기 보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적 신호를 일본 측에 보내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소녀상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 나름의 노력을 부각시켜 일본 정부에 나가미네 대사가 귀임할 수 있는 명분을 주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사진= 남궁진웅 timeid@]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소녀들

하지만 문제는 12.28 합의로 인해 한일 관계에서 주객이 전도됐다는 우려가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공세적 입장이었으나 일본 정부는 12.28 합의를 내세워 '합의금을 받았으니 소녀상 등을 철거하라'는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때문에 실제 피해를 입은 할머니들은 존재하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다했다는 입장으로 선회하고 우리 정부 역시 합의를 내세움에 따라 어느 누구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아울러 한일관계가 사안마다 맞받아치는 악순환의 고리로 빨려 들어가는 양상으로 한일 관계가 위안부 합의 이전보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특수관계에서 무역상대국으로 전락...길 잃은 한일관계


위안부 합의 이후 갈등 요인들이 있어도 전체적인 한일 관계의 선순환 흐름을 유지하는 측면, 북핵에 맞선 공조를 비롯한 대국적인 협력을 위해 양측이 공방을 자제했던 것도 '옛이야기'가 되고 있다.

단적인 사례는 우리 정부가 만든 동해 동영상과 관련한 공방이었다.

오는 4월 국제수로기구(IHO) 총회를 앞두고 지난 20일 외교부가 동북아역사재단, 동해연구회 등과 협력해 동해 표기 홍보 동영상을 새롭게 제작해 공개하자 일본 정부는 다음날 외교 경로를 통해 우리 정부에 항의했다.

동해 표기 건은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문제와 비슷한 정도의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일로 보기는 어렵지만, 양측은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을 역사의 피해자와 가해자 인식이 큰 영향을 미치던 시기와 냉전하에서 안보를 위해 경제면에서 협력하던 시기의 '특수관계'에서 한일 양국이 이탈하는 과정으로 분석한다.

일본 정부가 2015년부터 한일관계에 대한 수식어에서 '기본적 가치 공유'를 '전략적 이익 공유'로 대체한 데 이어 최근 관방장관 기자회견에서는 '중요한 무역상대국'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조세영 동서대 교수는 "한일관계가 '특수관계론'으로 해결하고 넘어가던 시절은 지났다"며 "앞으로 한일간에 이해관계에 따라 따질 것은 따지고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는 패턴이 많아질 것이니 그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