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책을 만나다] 기계의 발전, 강압적 노동에 '자유의 생기'를 불어넣다

2017-01-12 06:00
노동 없는 미래 | 저, 죄송한데요 | 롤러 걸

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밀린 집안일, TV리모콘과의 손가락 씨름, 아이들과 놀아주기 등 주말·휴일엔 '의외로' 할 일이 많아 피곤해지기 일쑤다. 그렇지만 책 한 권만 슬렁슬렁 읽어도 다가오는 한 주가 달라질 수 있다. '주말, 책을 만나다'에서 그런 기분좋은 변화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 '노동 없는 미래' 팀 던럽 지음 |엄성수 옮김 | 비즈니스맵 펴냄
 

'노동 없는 미래' [사진=비즈니스맵 제공]


기계·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인가? 지난해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기사 이세돌의 대결은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로 하여금 '인류의 미래'에 대한 본격적인 고찰을 하게 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이와 관련해 다양한 전망들을 내놓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 본연의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에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시기와 규모는 다르더라도 '일'의 불확실성이 늘어날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한 셈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팀 던럽은 "노동 없는 미래가 잠재적으로는 좋은 일"이라고 주장한다. 던럽도 로봇이나 기술이 우리가 하는 모든 노동을 대신 할 것이고, 이미 그런 일은 시작됐다는 데에는 견해를 같이 한다. 기술은 어느 순간 우리가 하는 일과 그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로봇이 우리의 일자리를 가져가는 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 플라톤, 칼 마르크스 등의 노동과 일에 대한 개념을 바탕으로 노동 개념의 진화, 현재의 노동 현실, 기술과 관련한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 등을 살펴본다. 또 현재 상류층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경제·사회 구조, 시장 자유화와 중산층의 탄생 등을 조목조목 짚으며 "노동의 미래를 기술적인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노동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우리가 받는 임금이 수세기 동안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결과라는 것을 이해한 후에야 '실제적인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가 주장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은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제공돼야 하고,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제공돼야 하며 사회복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계의 발달과 인간의 일자리를 단순 대치하지 않고, 노동에 대한 근본적 혁신을 주창하는 대목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268쪽 | 1만3000원

◆ '저, 죄송한데요' 이기준 지음 | 민음사 펴냄
 

'저, 죄송한데요' [사진=민음사 제공]


"아마 이쯤에서 차례가 나오리라 여기셨겠지요." 속표지를 넘겨 차례가 나옴직한 페이지에 생뚱맞은 문장 하나가 독자를 반긴다.

저자의 '육성 지원'이 되는 듯한 이 문장처럼 이 책에 차례는 없다. 그래서 아무 페이지나 넘겨지는 대로 시작해도 무방하다. 다만 저자의 소심함과 쫀쫀함에 실소를 터뜨리다가도 몇 개 에세이를 읽는 동안 아직 읽지 않은 꼭지를 빠뜨리지 않기 위해 다시 첫 페이지부터 성실하게 읽고 싶어질 수는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 북 디자이너 등으로 이름을 알린 이기준이 첫 산문집을 내놓았다. 그는 "사장으로, 직원으로, 가장으로, 주부로 지내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고 큰소리치고 싶지만 어느 입장도 온전히 체화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어느 쪽에 치우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태평하게 즐길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저자에겐 단순한 의식주에도 긴장이 고조되는 형국이 있고 기승전결, 클라이막스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층층이 쌓인 내용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포크로 눌러 압력을 가한 채 나이프로 왕복 운동을? 이등분으로 썰기가 최선일 듯합니다. 내용물이 전부 쏟아져 내려도 괜찮다는 전제 아래서요." 높이 20cm 정도의 햄버거를 앞에 두고 저자는 먹고 입고 자는 일의 복잡다단함을 매일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표한다. 

어디 그뿐이랴. 저자는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서 "하루에 몇 끼 드세요?"라는 영양사의 단순한 질문에도 쩔쩔맬 뿐만 아니라, 급성 식중독으로 데굴데굴 구르는 상황에서도 첫 '들것'의 경험에 앞서 양말을 챙겨 신을지 자연스럽게 맨발로 오를지 고민하고, 고속도로에서 만난 생선 트럭 운전수의 넉살 좋은 제안 앞에서 동선과 동작을 고심해 생각할 시간을 벌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의 이런 일화들이 마냥 우습지만은 않다. 그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가 습관처럼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많은 일들 속에 사실은 부자연스러운 점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반문하는 에너지이자,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세상을 지탱하는 질서를 발견하게 되리라 믿어 왔지만 그런 건 원래 없을지도 모릅니다. 뿌리 없이 둥둥 떠다니는 것들이 서로 맞물리는 힘의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겨우 유지되는 곳이 세상일지도 모릅니다."(본문 153쪽)

하긴 질서가 있었다면 세상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터다.

168쪽 | 8800원

◆ '롤러 걸' 빅토리아 제이미슨 지음·그림 | 노은정 그림 | 비룡소 펴냄
 

'롤러 걸' [사진=비룡소 제공]


'롤러 더비'는 팀을 이뤄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질주해 득점을 얻는 스포츠로, 미국에서 취미활동은 물론이고 정규리그가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종목이다. 

이 책은 롤러 더비라는 스포츠를 통해 성장의 통과의례들을 당차게 겪어 나가는 열두 살 소녀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2016 뉴베리 명예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애스트리드는 엄마가 체험학습 삼아 데려가 보여 준 롤러 더비 경기를 보고 첫눈에 반해 절친인 니콜과 함께 주니어 롤러 더비 캠프에 등록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니콜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피하더니 애스트리드가 끔찍히 싫어하는 다른 여자아이와 발레 캠프에 등록해버리고 만다. 애스트트리드는 '기억하는 한 모든 걸 함께해 온 니콜이 어쩌면 이렇게 자신에게 등을 돌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화도 나고 괜한 오기도 생긴다.

결국 혼자 롤러 더비 캠프에 참가하게 된 애스트리드는 만만하게 봤던 롤러스케이트가 결코 자신의 뜻대로 쉽게 굴러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섭고 드세 보이는 언니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라는 걱정에 이어 '왜 나는 이것밖에 못하는 걸까'라는 자괴감까지 드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엄마와의 관계도 뜻하지 않게 어그러지려 한다. 애스트리드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애스트리드의 엄마는 딸의 견문을 넓혀 주고 싶어서 문화 체험의 밤, 미술관 전시 등에 딸을 열심히 데리고 다닐 뿐더러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서는 선머슴 같은 딸에게 단정하고 예쁜 모습을 갖춰 주려고 애쓴다. 하지만 애스트리드에게 그러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롤러 더비를 통해 자신 앞에 놓인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새로운 세계를 담담하게 헤쳐 나갈 뿐이다.

이 책은 영원한 숙제인 엄마와 딸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풀어내 공감의 장을 마련해 주고, 멍들고 부딪히며 이겨 나가야 하는 스포츠를 통해 누구나 겪는 성장의 기복을 건강하고 유쾌하게 보여 준다.

저자 빅토리아 제이미슨의 탄탄한 문장과 친근하고 따뜻한 그림이 매력적인 책이다.  

240쪽 |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