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장미, 그리고 태극기의 문화코드

2017-01-05 16:22
[기고] 이학주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           이학주 원장


촛불과 장미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하고 좋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소원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촛불이 있고, 열정적인 사랑에는 장미꽃이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광장에 촛불과 장미가 등장했다.

광장은 마당이다. 마당은 화목을 위한 복합적인 장소이다. 혼례잔치, 환갑잔치가 열리고, 알곡을 털고, 모깃불을 피워놓고 가족이 도란도란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던 공간이다. 반면, 싸움이 있을 때 마당은 피비린내는 장소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꽃다운 청춘들이 전쟁터로 위안부로 끌려가던 장소였고, 6.25한국전쟁 때는 이념으로 얼룩져 죽음이 있던 장소였다. 바로 이 마당에 촛불과 장미라는 이질적인 두 요소가 지금 자리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한쪽은 촛불을 들고 기원을 하고, 한쪽은 장미를 들어 바치고 있다. 그렇다면 촛불과 장미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

촛불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어머니 아버지가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과 집안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들이 좌정해 있는 산천으로 가서 자연신께 역시 가족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던 상징이었다. 또한 마을공동체나 국가공동체에서도 마을제사와 국가제사 때 산천신과 하늘의 신께 간절히 공동체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며 촛불을 밝혔다.

촛불에는 자기 자신보다는 가족이나 공동체 구성원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비는 그야말로 이타적인 사랑이 잠재해 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심상(心象)이라 할 수 있다. 남에게 폭력을 쓰지도 않고, 자신이 살아온 것처럼 정직하게 소원이 이뤄지기만을 기원할 따름이다.

장미는 우리의 촛불 심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설총이 신문왕께 <화왕계(花王戒)>를 예로 들어 아뢰는 장면이 나온다.

<화왕계>에는 장미와 할미꽃이 등장한다. 이때 장미가 나오는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홀연히 한 아름다운 사람이 붉은 얼굴과 옥 같은 이(齒)에 곱게 화장하고 맵시 있는 옷을 입고 갸우뚱거리며 와서 얌전히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첩은 눈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닷물을 대하고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시원타 하고 제대로 지내는데, 이름은 장미라 합니다. 왕의 착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장막 속에서 모시려고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허락하시겠습니까’ 했다.” 아첨의 대명사로 볼 수 있다.

아울러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왕께 아양을 떨고 있다. 남이 보지 못하도록 장막으로 가리고 행동한다. 장미가 아첨과 사욕과 폭력적임은 그 다음에 백두옹(白頭翁)으로 나오는 할미꽃의 형상과 모양을 보면 분명하다.

반면,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국기이다. 태극기를 들 때는 나라와 나라 간의 회의나 대결이 있을 때이다. 깃발이 상징하는 영역표시의 문화적 속성이다. 그 때문에 전쟁에 임할 때 깃발을 들어 자신의 영역을 나타낸다. 전쟁 중 상대 진영에 국기를 꽂으면 승리를 뜻한다. 3.1운동 때 태극기를 들고 목숨을 바치며 항일을 했던 우리의 조상도 일본침략자들에게 우리나라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월남 전쟁 중에 우리 군인이 참전하러 갈 때 학생들이 길거리에 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했던 것도 세계만방에 우리나라의 기상을 알려달라고 외친 것이다. 이처럼 국기는 자국민을 대항해서 드는 것이 아니다. 자국민을 대항해서 드는 국기는 통치와 억압의 상징이다. 이념을 획일화 시켜 모든 국민을 옭죄고자 하는 옹고집쟁이, 그리고 독재자의 논리이다. 자국민을 대항해서 드는 국기는 국민을 적으로 보는 행위이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영역표시와 적과 싸울 때 들어야 한다.

이로 보면 태극기를 들고 태극기에 인사를 하는 행위는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충성이라고 한다면, 국가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사욕을 버려야 한다. 진정 충성이라면 세월호 침몰로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지, 태극기를 들고 충성이라고 외치는 행위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아첨과 폭력, 그리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태극기가 들려져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