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걷기왕' 심은경,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2016-10-20 11:20
스릴러 영화 ‘널 기다리며’ 이후 7개월여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심은경은 이전보다 밝은 얼굴이었다. 그 사이 무엇인가 깨달은 것처럼, 혹은 무엇인가를 내려놓은 것처럼. 어쩌면 체증이 풀린 것처럼 말이다.
영화 ‘걷기왕’(감독 백승화·제작 ㈜인디스토리·공동제작 AND·제공 배급 CGV아트하우스)은 선척적 멀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여고생 만복(심은경 분)이, 경보를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무조건 ‘빨리’, ‘열심히’를 강요하는 세상과 분투를 하는 이야기로 따듯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이 인상 깊은 영화다.
영화 ‘써니’, ‘수상한 그녀’를 지나 드라마 ‘내일은 칸타빌레’, 영화 ‘널 기다리며’ 등 숱한 작품 속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왔던 심은경은 영화 ‘걷기왕’을 기점으로 어떤 변화를 맞게 됐다.
- 주변 분들도 ‘시간이 없지 않냐’, ‘바쁘지 않냐’고 하시는데 정작 저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었다. 9월 중순에는 여행도 다녀왔고, 영화 촬영하면서 틈틈이 쉬는 시간이 생겼었다. 어떤 날은 집에만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심심할 때도 있었고.
이전에 만났을 땐 자기의 삶을 찾고 싶다는 고민을 털어놨었다
- 여유를 찾으려고 그랬던 것 같다. 일에만 전념하지 않으려 하고, 심적으로 여유를 찾고 싶었다. 그래야 제가 하는 일에도 힘이 생기니까. 그런 중요성을 알게 됐다. 그 전에는 하나에 매진하는 타입이었는데 이제는 쉬엄쉬엄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 정말이다. 가벼워졌다. 시나리오를 읽고 한 번에 결정을 내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만복이라는 캐릭터를 하나하나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10대 때, 경험했던 걸 잘 살려서 녹여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러운 모습, 평소의 나를 끄집어내려고 했다.
이번 영화를 통해 치유하는 과정을 겪은 듯하다
- ‘걷기왕’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저의 고민거리를 정리하던 시기였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많은 공감이 됐고, 만복이를 통해 저의 현실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독립영화의 분위기는 어땠나? 작은 영화 특유의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심은경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을 것 같은데
- 다들 즐기는 분위기였다. 한동안 연기적인 고민으로 힘들었는데, ‘걷기왕’을 보며 그동안 내가 즐기며 작업하지 못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잘하는 것에만 치중했던 게 아닐까, 연기적인 본질을 잃어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걷기왕’을 통해 다시금 처음 연기하던 시절의 감정을 느끼게 됐다. 초심을 안 잃겠다고 했었는 데 오래 연기를 하다 보니 당연한 습관이나 일거리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 반성을 했고, 예전처럼 다시 즐기며 촬영할 수 있었다. 관객분들은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스스로에겐 너무도 만족스럽다. 남다른 애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만족스럽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
- 즐기면서 했기 때문에 어떤 평가를 받더라도 만족스럽다. 욕심을 내려놓게 된 것 같다. 오히려 전작의 경우, 마찬가지로 노력했지만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헷갈리는 게 많더라. 이번 작품은 촬영 자체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결과물을 보며 뭉클하기도 했다.
주연배우로서 갖는 고민이나 부담도 많이 덜어진 건가?
- 그런 부담이나 책임감은 아예 없을 순 없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항상 신경 쓰이고 흥행이 되면 기분이 좋고…. 만약 흥행이 안 된다면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쏠리면 안 될 것 같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걷기왕’ 통해 느낀 거다. 한동안 흥행에 목매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진심 어린 연기보다 잘하는 것에 치중했던 것 같다. 계산하는 연기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캐릭터에 동화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거다 언젠가부터 내 연기에 부족함을 느꼈다. 해답을 얻지 못해 답답했었는데 저를 내려놓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속, 심은경의 모습도 편안해 보였다. 보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게 편안하게 다가오더라
- ‘걷기왕’은 그런 작품이다. 보는 이들도 편안해야 한다. 제가 편안해야 관객들도 편안할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계산하고 만들기보다는 생각을 비워두고 촬영에 임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좋은 아이디어나 연기가 나오더라. 애드리브도 곳곳에 있었고.
어떤 장면이 애드리브였나?
- 소소한 부분이다. 키미테패취를 붙이고 경기를 나가서 옷도 못 입고 해롱해롱 하거나, 수지가 “왜 이래 얘”라고 하면 “어, 미안하다”고 반말하는 장면 등이 다 애드리브였다. 그 장면에서 지문은 ‘정신을 못 차리고 해롱해롱한다’였는데, 즉석에서 만들어졌던 것 같다.
‘걷기왕’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나 편안함이 이후 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나?
- 고민의 지점이 달라졌다. ‘걷기왕’을 끝내고 ‘특별시민’으로 바로 들어갔는데 두 작품은 180도 다른 작품이다. 처음으로 성인 연기에 도전했다고 생각한다. 정치영화고 직업군을 가진 여성인데 제 나이보다도 많은 나이를 연기하게 됐다. 직업 용어나 어려운 단어를 많이 사용해서 과정을 하는 연기 톤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점들이 어렵게 다가왔지만, 예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처럼 보일까’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캐릭터에 대해 이해하려고 한다.
‘걷기왕’이 심은경에게 해답을 준 것 같다
- 조금 천천히 가도 되지 않을까? 괜찮다는 말을 해준 작품이다. 내려놓는 작업이 굉장히 힘들었는데 내려놓음으로써 이후 영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전에는 내려놓는다는 게 굴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존심이 상했는데 ‘걷기왕’을 통해 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답다는 걸 깨닫게 됐다. 여유롭게 지낼 수 있고, 생활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연기적으로도 영향을 받았고, 다음 작품에서도 그런 생각이 바탕이 돼 한결 연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 ‘널 기다리며’ 당시보다, 더 밝아 보여서 마음이 놓인다. 이 영화가 심은경에게 끼친 영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 정말? 하하하. 이 작품이 내게 온 건 정말 행운이다. 너무도 소중하고, 애정이 많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