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칼럼] 거지들의 전쟁

2016-10-20 00:00

영화 '범죄의 여왕'으로 장편 영화 데뷔를 한 이요섭 감독[사진=이요섭 감독 제공]


이요섭 영화 감독 

<영화의 탄생>


어두운 방, 어둠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뻗어나간다. 그리고 빛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종교의식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이곳을 우리는 극장이라 부른다. 2016년 8월 25일, 내가 만든 영화가 극장에 개봉했다. 시나리오를 쓰기시작한 지는 2년, 촬영을 마친 후, 1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이 영화는 “범죄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걸고 관객과 만났다. 같은 날, 여름 대작 영화들을 피해 나와 같은 처지에 속하는 작은 영화들이 개봉했다. 나는 이 날을 “거지들의 전쟁”이라 불렀다. 거지들에겐 의미 있을 것이고 아닌 자들은 그 날이 전쟁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거지들의 전쟁>

올 해 여름은 더웠다. 그 이유인지는 극장에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다들 오래 걸려있었다. 그들을 피해 그나마 결정한 날이 8. 25일이다. 여름의 끝.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영화들이 큰 영화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었다. 모두들 그 사이에서 승리를 바랬다. 모두들 결과를 예상할 수 없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을 꿈꿨다.

-1주차
“범죄의 여왕”이 개봉한 첫 주 260개 정도의 상영관에서 안정적으로 출발한 듯 보였다. 다들 이정도면 작은 영화치곤 괜찮은 상영관을 잡았고 안정적으로 상영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던 순간 친구들에게 연락이 온다. 네 영화 시간이 좀 이상하다고 왜 이렇게 시간표가 구성되어 있냐고 묻는다. AM 8:00와 AM 25:00 상영이 잡혀있는 곳도 있고 18:00 이후 (관객이 가장 붐비는) 시간대는 아예 잡혀있지 않았다. 혹자들은 이런 식으로 잡혀있는 시간대를 ‘텀벙텀벙’이라고 부른다. 큰 영화들은 가장 좋은 시간대를 배치해주고 흔히들 ‘다양성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을 틈바구니의 다른 시간대에 배치하는 것.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SNS에서 내 영화를 검색해본다. 텅 빈 극장에 두 발을 올리고 ‘오늘 극장 전세 냈다. 기쁘다’ 이런 소식이 빈번하게 올라온다. 첫 주차에 나와 배우들은 무대 인사를 돌며 관객들을 만났고 상영 2주차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2주차 
상영시간대가 텀벙텀벙 요동쳤던 영화는 좌석점유율이 좋지 못했다. ‘좌석점유율’이란 한 극장에 좌석이 얼마나 찼는지를 볼 수 있는 수치이다. 관객들에게 극장전세를 줬던 영화는 점유율이 좋을 수 없었고 2주차에는 60개관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게 불과 영화 개봉한지 4일이 지난 후 일이다. 여기서 고민해볼 문제가 있다. 영화는 재미가 있다면 얼마든지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을 하며 흥행할 수 있다. “과연 내가 만든 영화는 재미있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재미없는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시장경제논리에 맞는다. ‘스스로 자신의 영화가 재미있다’라는 건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이 많이 투입된 영화는 재미를 떠나 자본의 크기 때문에 보호받기 쉬워진다. 그만큼 홍보를 하고 그만큼 상영관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은 영화는 어떨까? 영화의 관객을 만나면서 완성된다. 하지만 이 기본가치가 흔들리면 영화는 자신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한마디로 작은 영화들은 고유의 가치를 상실하기 쉽다는 뜻이 된다.

-3주차 
추석이 다가왔다. 날씨는 서늘해지고 또다시 대작영화들이 추석시즌을 맞아 개봉했다.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영화들은 IPTV로 이동해서 다른 살길을 모색하게 됐다. 이제 20개관 이하로 극장이 줄었다. 지방에서 멀티플렉스에 상영하던 영화들도 다 내리게 됐다. 명절이라 사람들로 북적이는 극장가에서 빠져야할 때가 왔다. 이제 하루에 100명 남짓한 사람들이 극장을 찾아준다. 이 관객들은 어려운 시간배정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찾아온 고마운 관객들이다. 이렇게 4주차로 넘어가게 된다.

-4주차 
지금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적고 있다. 개봉이 시작된 순간 감독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던 사람에서 마권을 들고 경주마를 보고 있는 도박꾼으로 변신한다. 매일매일 스코어를 체크하고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의 연속이다. 영화가 내릴 즈음부터 도박꾼의 물이 빠져가고 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

<마치며>
이 ‘거지들의 전쟁’은 16년 8월에 특별하게 생긴 일이라기보다는 극장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작은 소동이다. ‘범죄의 여왕’은 이 작은 소동에서 그래도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케이스다. 더 작은 더 힘든 영화들이 일 년에 수도 없이 사라진다. 조금이라도 이 사라짐의 속도를 늦출 수 있으면 다양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