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08]명예회장 추대
2016-09-05 17:17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08)
제6장 재계활동 - (103) 명예회장(名譽會長)
제6장 재계활동 - (103) 명예회장(名譽會長)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73년 4월 20일 오전 10시, 한국무역협회 제27회 정기총회가 신축한 새 회관 2층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때마침 몸이 불편하여 병석에 있었고, 김진하(金鎭河) 상근부회장(常勤副會長)이 개회사를 대신 읽었다.
이날 총회에서 나익진(羅翼鎭) 부회장은 몇몇 이사들과 의견을 나누어 명예회장(名譽會長) 고문제(顧問制)를 신설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정관(定款) 일부 개정안 가운데 당초엔 명예회장과 고문을 회장이 추대한다고 한 것을, 명예회장은 총회의 결의를 거쳐 회장이 추대한다고 수정하고, 고문은 임원회의 결의를 거쳐 회장이 추대한다고 수정하여 통과시키기로 하였다. 그리고 임시의장(臨時議長)에 오정수(吳楨洙)를 선임하고 임원 선임에 들어가 다음과 같이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명예회장(名譽會長) 이 활(李 活)
상근회장(常勤會長) 박충훈(朴忠勳)
이날 총회는 회장을 교체시켰으면서도 목당이 출석하지 못하여 퇴임사(退任辭)도 취임사(就任辭)도 없는 총회가 되었으므로, 뒷날 목당이 건강을 회복하여 협회에 나오게 되자 임원회의를 열어 이취임식(離就任式)을 따로 가졌다.
병석에서 총회 소식을 들은 목당의 가슴은 만감(萬感)이 교차하였다.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대로 무역으로 성공하여 한국은 중진국(中進國) 대열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지하에서 인촌을 보고 있다면 그를 향해 한마디 던지고 싶은 것이다.
“여보소 인촌, 장돌뱅이 덕택으로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 자가용차를 몰게 되었소. 그런데 정치꾼들은 어떻게 되었소. 오늘도 격돌을 되풀이하며 혼란만을 빚고 있소. 전후(戰後)의 세기는 경제우위(經濟優位)의 시대였던 거요.”
그리고 그를 야유하던 국회의원들에게도 그는 할 말이 있었다.
“당신네들은 권세나 잡자고 밤낮 아웅다웅 다툼이지만 우리 무역업자(貿易業者)들의 무역의 성공으로 오늘 세계 속의 한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는 것 잊지 말아야 될거요.”
그는 창밖의 라일락꽃이 풍기는 달콤한 향기에 취한 듯 언제까지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영국에서 꿈을 키우던 시절 그는 조국의 광복에 대비한 자주독립의 방책을 무역입국에 있을 뿐이라고 판단하고 오로지 무역입국의 방안을 연구하는 데만 일념했다.
다행히 광복(光復)을 맞은 조국에서 그는 무역협회에 몸을 담게 되었고, 봉사(奉仕)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하늘의 축복이었다.
덕불고(德不孤, 덕이 있는 사람은 덕으로 다른 사람을 감화시켜 따르게 하므로 결코 외롭지 않음)라 했지만 그의 뜻을 알아주는 동지들이 또한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회원 상사들이 그를 믿음으로 밀어 주었다. 그들의 힘을 입어 대과(大過) 없이 후회 없는 길을 걸어올 수 있었으니 고마울 뿐이 아닌가.
목당은 ‘논어(論語)’의 이인편(里仁篇)의 한 구절을 입속으로 되뇌어 본다.
- 군자지어천하야(君子之於天下也)에 무적야(無適也)하며 무막야(無莫也)하야 의지여비(義之與比)니라 -
군자는 천하의 모든 것에 임할 때 어느 한 가지만을 옳다고 고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안 된다고 부정하지도 않으며 다만 올바른 의(義)만을 좇아 사사로움을 떨쳐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