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00]잃은 게 많은 정치활동

2016-08-25 06:14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00)
제6장 재계활동 - (95) 정계 하직(政界 下直)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2기를 열어야 할 선거가 닥쳐오고 있었다.

재야정가(在野政街)의 3개 야당은 통합했다가 한·일협정(韓·日協定) 파동에 휩쓸려 다시 분열하고 있었다. 박순천(朴順天)·유진산(柳珍山)의 민중당(民衆黨)과 윤보선(尹潽善)의 신한당(新韓黨)으로 갈린 두 야당은 철저한 불신 속에서 서로를 헐뜯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 직전 두 야당은 통합을 실현하고, 윤보선이 통합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두 번째 도전에 나설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급조 통합된 야당 특히 이들 야당 안의 이른바 온건파인 민중당 계열은 윤보선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선거 전열은 가다듬어지지 않았으며 정권 교체에 대한 확신이나 열의도 없었다. 그들의 눈길은 대통령 선거 이후의 국회의원 공천, 그리고 그 선거에만 쏠려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여당권의 목표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선(改憲線)을 확보하는 일이어서, 원래 3분의 2선을 확보하여 대통령 2기 이후의 길을 독자적으로 열 수 있는 힘을 확보한다는 것이 여당의 주요 과제였다. 이런 목표가 설정되었을 때 김종필(金鐘泌) 공화당(共和黨) 의장(議長)이 선거를 주관하고 진두지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거 포진의 주역은 4인 체제와 대통령의 행정막료(行政幕僚) 쪽으로 넘어갔다. 비서실장 이후락(李厚洛)과 정보부장 김형일(金炯旭), 공화당 4인 체제의 핵심인 길재호(吉在號) 사무총장과 김성곤(金成坤) 재정위원장이 바로 1967년 선거 포진의 중심인물이 된 것이다.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의 공천을 비롯한 모든 결정이 이들 네 사람의 손에서 주물러져서 총재인 박 대통령에게 올려졌다. 이들 네 사람의 중심권엔 행정부의 정일권(丁一權) 총리, 공화당의 백남억(白南檍) 정책위원장, 김진만(金振晩) 원내총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종필 당의장은 명목만의 당의장일 뿐 중심권에서 소외되고 있었다. 김종필과 4인 체제의 불화는 선거 준비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당내의 잡음이 마찰로 혹은 파쟁으로 되어 소리를 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이런 판국에 그 어느 쪽도 아니었고 다만 공화당의 평당원(平黨員)에 불과했다. 차기 공천을 얻어내겠다는 확신도, 의욕도 없었다. 사태에 맡긴다는 담담한 나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천 지구의 인심은 목당에게 쏠리어 있었고 공화당 안에서도 목당의 공천은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도당(道黨) 사무국장 김호칠(金好七)이 기반 구축에 나섰다는 보고가 중앙당(中央黨)에 들어와 예춘호(芮春浩) 사무총장이 항공편으로 급거 대구로 내려와 그럴 수 있느냐고 만류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듣고도 목당은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음 입후보(立候補)를 갈망했다면 이런 일이 있을 때 한번쯤 도당에 얼굴을 내밀만한 일인데 목당은 그런 걸음도 않고 있었다.

막상 공천이 발표되고 보니 얼토당토 않은 이원병이란 인물이 지목되고 있지 않은가. 대학교수(大學敎授)라고 했으며, 엄민영(嚴敏永)이 내무부장관으로 있을 때는 배후에서 작용한 인물이라 했다. 예춘호 사무총장은 섭섭하게 되었다면서 비례대표(比例代表)를 약속했지만 그 뒤의 비례대표 명단에서도 목당의 이름은 제외되고 있었다.

4인조는 그들대로, 그리고 박 대통령의 행정막료들은 또한 그들 나름대로 내일의 전쟁을 위한 포진에 혈안이었고 보면 목당과 같은 군자는 그들에겐 보탬이 안된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이렇게 되어 그는 정치 핵심부서에서 하루아침에 정치권(政治圈) 밖으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그러나 목당은 낙천(落薦)되었다고 하여 실망하는 빛도 없었고, 민망해 하는 빛도 없었다. 잘되었다는 그런 심정이었다. 어쨌든 이리하여 정치에 두었던 목당의 꿈은 가고 실망만을 남겼다.

원래 정치엔 비위가 맞지 않는다고 했던 목당이었는데, 4·19 학생혁명(學生革命)으로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그리고 유진오(兪鎭午) 총장을 비롯한 일부 고대(高大) 교수들의 강력한 권고가 있는데다가 고대 학생들의 간곡한 바람까지 있어 숙고한 나머지 국회 진출을 생각하게 된 목당이 아니던가.

그가 민주당(民主黨) 공천을 얻지 못하였으면서도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것도 이긴다는 신념에서였던 것이다. 실상 그는 처음 출마에선 낙선되고 있었지만 그 다음 선거에 입후보해선 거뜬히 당선되지 않던가. 처음엔 목당의 진심이 유권자들에게 통하지 않다가 결국은 이해하기에 이르렀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목당은 그걸로 족했다. 그것은 값비싼 소득이었다. 잃은 것은 별로 없고 값비싼 체험을 얻었으니 결국 목당은 득이었다는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