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범죄의 여왕' 이요섭 감독, 빨간 여자와 이상한 아이들의 집
2016-09-01 07:00
감독의 성격이 영화에 얼마만큼 미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성향과 스릴러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기우였다. 영화 ‘범죄의 여왕’이 가진 독특하고 매력적인 분위기는 모두 그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범죄의 여왕’(감독 이요섭·제공·배급 ㈜콘텐츠판다·공동제공 공동배급 TCO㈜더콘텐츠온·제작 광화문시네마)은 아들이 사는 고시원에 수도요금이 120만 원이 나오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가 또 다른 사건을 파헤치게 된 미경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 개봉 후, 제일 걱정했던 건 ‘시간 버렸다’는 반응이 있을까 봐…. 하하하. 좋았다, 나빴다 하는 반응들이 올라오는데 그래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좋게 보셨구나, 글을 남겨주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누군가 이 영화를 지지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안심이 됐어요.”
관객들의 반응을 예상하기란 어렵다. “감상평은 천편일률적일 수 없고” 저마다 체감하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리 짐작하기 힘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요섭 감독은 또 하나의 예측 불가를 꺼내놨다. 바로 예상 별점이었다.
“‘왓챠’라는 영화 별점 앱이 있어요. 그동안 본 영화들을 별점을 매겨놓으면 제 취향에 맞게 영화들을 추천해주거나 예상 별점이 나타나요. 그런데 ‘범죄의 여왕’ 예상 별점이 2.5점인 거예요. 하하하. 내 영화인데…. 뭐지? 민망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더라고요.”
이 감독의 말마따나 ‘범죄의 여왕’은 지지해주고 싶은 영화다. 이 작품이 가진 독특한 감성과 캐릭터는 분명, 따분한 작품들과는 구별 점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시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스릴러라는 중심축을 단단히 잡으면서, 군데군데 웃음코드들 심어놓는 것에 성공했다.
“스릴러와 코미디를 조율하는 건…. 잘 모르겠어요. 사실 처음에 시나리오를 썼을 땐 코미디 성향이 더 강했거든요. 심지어 우리는 현장에서 ‘이건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찍었어요. 그런데 편집을 하고 보니 스릴러인 거예요. ‘아! 이게 스릴러였구나!’ 했었죠. 하하하.”
‘범죄의 여왕’ 속 인물들은 좀처럼 평범하지 않다. 불법시술을 자행하는 야매 미용실 원장 미경(박지영 분)부터 개 같이 태어난 남자 개태(조복래 분), 게임중독자 진숙(이솜 분), 10년간 고시를 준비해온 하준(허정도 분)까지. 일상 속, 어디에나 있을 법하지만, 또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역시 가장 공을 들인 건 미경의 캐릭터에요. 미경의 경우 제가 캐릭터를 잡다가 전고은 감독이 각색해 완성한 것이거든요. 엉뚱하고 갑작스러워야 하는데 밉지는 않고, 엄마에 대한 이미지를 가졌으면서도 여성스러운…. 그런 표현들이 힘들더라고요. 다행히 각색을 거치고 미경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됐어요. 박지영 선배와 이야기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사랑스러운 느낌이에요. 그럼에도 아줌마, 엄마의 모습을 겸비하고 있고 성적 긴장감도 있어야 하죠. 이런 어려운 느낌은 모두 집 주인, 박지영 선배 덕분에 이룰 수 있었어요.”
이요섭 감독은 영화 ‘귀향’(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여주인공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분)를 미경의 모티브로 삼았다.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보다는 스페인영화의 여성 캐릭터”처럼 보이길 바랐던 것이 이유였다.
“라이문다의 경우 기구할 수는 있지만 그 삶 자체는 건강해 보이더라고요. 엄마로서, 여자로서 한없이 강하다도 연약하기도 하고. 시나리오를 쓰다가 보니, 제가 어릴 때 생각했던 엄마의 강인한 모습들이 점점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당신은 이렇게 약하지 않다. 당신도 여자다’라고요.”
엄마와 여자, 아줌마는 좀체 연결하기 힘든 단어들이다. 하지만 그 단어들은 우리와 가장 가깝고 또한 우리를 쉽게 관통하곤 한다. ‘범죄의 여왕’이 특별한 것은 이 단어들과도 관련이 깊다. 엄마와 아줌마와 여자, 그 모든 중심에 서 있는 미경 때문에.
“저는 미경을 빨간 여자라고 생각해요. 침침한 톤의 공간에 빨간 여자가 등장하고, 그곳에 색깔을 입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빨간 여자, 아주 명확하게 미경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선명하고 화려한 색깔을 가진 여자라서 그런 걸까? 미경의 외형 또한 남들과는 달랐다.
“예전에 아내인 전고은 감독이 한 여자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울진에 사는 여자인데 아주 화려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평판이 안 좋았대요. 롱부츠에 숏커트, 호피를 즐겨 입는 여자거든요. 그녀는 결혼도 안 하고 어린 남자친구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사람들은 그걸 싫어했어요. 자기랑 다르니까요. 문득, 그 여자의 삶이 궁금하더라고요. 그러다가 미경을 떠올리게 됐고 자연스럽게 그 화려한 ‘색깔’을 미경에게 입히게 됐어요.”
이요섭 감독은 미경에 대해 “꿈도 많고 예쁜 여자였을 것”이라고 했다. “지역 미인 대회에서 수상경력 정도는 있을 것”이며 “남자를 만나 뒤통수도 맞고 인생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거라고도 했다. 이 같은 미경의 전사는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줬고, 작은 디테일로 더욱 섬세하게 그려졌다.
“박지영 선배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함께 일하면서 ‘노련하다’는 말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됐어요. 제가 막히는 순간에도 풀어가는 방식을 찾고, 어떤 걸 요구하더라도 절대 ‘노(NO)’라는 법이 없었어요. 사실 박지영 선배에게 저는 까마득한 후배고 예리하게 보자면 한도 끝도 없이 모자랄 텐데도 무조건 절 믿어주셨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창작집단 광화문시네마는 ‘1999, 면회’, ‘족구왕’, ‘범죄의 여왕’까지 점점 더 그 색채와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요섭 감독은 자신이 속한 광화문시네마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드러내며 차기작 ‘소공녀’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아마 제가 혼자서 작업했다면 많은 걸 놓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영화 촬영장이 쏟아지는 모래알이라면 광화문시네마는 그게 새어나가지 않게 받쳐주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라서 사람들을 더 많이 신경 쓰려고 해요. 우리의 차기작은 전고은 감독의 ‘소공녀’에요. 시나리오 완성도도 높고 내부에서 평도 좋아서 기대가 커요. ‘범죄의 여왕’이 잘 풀려야 ‘소공녀’까지 이어질 텐데.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