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하정우, '터널'에 갇혀 자유를 맛보다

2016-08-11 00:03

영화 터널에서 정수 역을 열연한 배우 하정우가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아주경제 김은하 기자 = 자동차 영업대리점의 과장 정수(하정우)는 큰 계약 건을 앞두고 들뜬 기분으로 집으로 가던 중 갑자기 무너져내린 터널 안에 홀로 갇히고 만다.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뿐. 그가 가진 것은 배터리가 78% 남은 휴대전화와 생수 두 병, 그리고 딸의 생일케이크가 전부다.

하정우는 영화 ‘터널’에서 35일간 터널에 갇힌 남자 정수를 연기했다. 재난과 마주한 한 남자의 원맨쇼에 가까운 고군분투라는 점에서 그가 2013년 출연한 ‘더 테러 라이브’를 떠올릴 수도 있다.

“비슷한 느낌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시나리오를 읽고 나니 충분히 다른 영화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죠. 터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더 테러 라이브’에서 한강 다리를 폭발시킨 테러범과의 통화를 독점으로 생중계하며 메인 뉴스 진행을 노리는, 야욕 넘치는 앵커를 연기했던 하정우는 영화 ‘터널’을 통해서는 무너진 터널에서 구조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평범한 소시민을 연기한다.
 

[사진=영화 '터널' 스틸]

영화를 이끄는 팔 할은 홀로 터널에 갇혀 상대 배우의 리액션 없이 펼치는 하정우의 모놀로그 연기다. 좁은 터널에 하정우를 가둔 김성훈 감독은 대본을 헐겁게 써 하정우가 자유롭게 움직일 공간을 확보했다.

“그 순간 제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자유롭게 연기해달라는 것이 감독님의 주문이었어요.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느끼는 것,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말을 모두 표현할 수 있어 짜릿했죠. 특히 전작 ‘아가씨’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촘촘하고 정교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재단한 듯 연기했던 터라 상반된 작업이 더욱 재밌게 다가왔죠.”

어두운 터널에서의 연기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백여 명의 스태프와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돌아가는 여타의 현장과 달리 ‘터널’은 실제 같은 세트에 하정우를 홀로 가둬놓고 카메라도 모두 안 보이게 설치했다. 덕분에 마음대로 원 없이 연기했지만, 스태프의 역할까지 해야 했단다. “실내등과 손전등으로만 조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명감독이 손전등으로 이것을 비춰라, 이번에는 얼굴을 비춰야 된다, 반사를 때려달라고 매 장면 요구해 조명 스태프 역할도 했다”는 그는 엔딩 크레딧에 조명 담당으로 이름을 올렸다.
 

[사진=영화 '터널' 스틸]

얼핏 어둡고 답답한 영화라는 선입관을 가질 수 있지만 보는 내내 느닷없이 웃음이 터진다. 차 트렁크에서 발견한 세척제로 더러워진 차 안을 살뜰히 청소하고, 손톱깎이로 수염을 면도하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클래식 음악도 감상하는, 급박한 상황에 안정적으로 적응하는 정수의 모습이 특히 그렇다.

“‘터널’은 이미 무겁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설정이기 때문에 연기까지 어둡게 가는 건 보는 분들이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데,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익숙해지지 않겠어요? 톰 행크스 주연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떠올렸죠. 주인공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잖아요.”

이번 영화에도 어김없이 하정우의 먹방이 펼쳐진다. 터널이 무너지며 생긴 어마어마한 양의 분진은 모두 콩가루와 미숫가루다. 김 감독이 굴착기로 수시로 뿌려댄 덕에 실컷 들이마셨다. 또 있다. “안 그래도 이번에는 무엇을 먹어야 하나,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궁금했다. 개 사료더라. 간이 안 되어 있지만 퍽 먹을만했다”는 하정우는 “관객들이 내 먹방을 건빵 속 별사탕으로 여겨주시는 것 같다. 한때는 (먹방이) 부담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고 했다.

‘신과 함께’ 촬영을 시작하자마자 ‘아가씨’로 칸까지 다녀온 하정우는 차기작 촬영과 ‘터널’ 홍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스스로 “아이돌급 스케줄”이라며 혀를 찰 정도니 말 다했다.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영화 터널에서 정수 역을 열연한 배우 하정우가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얼마 전 맷 데이먼의 인터뷰를 봤는데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1년을 쉬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 생기면 쉴 생각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 제게 가장 가치 있는 건 영화를 찍는 일이에요. 어떤 일이든 많이 하고 경력이 쌓이면 익숙해지는 법인데 연기는 그러질 않네요. 그래서 늘 어떤 작품,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야 할지, 또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해요. 정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저도 놀랄 정도로 늘상 이 고민을 늘 해요. 하면 할수록 어려운데 그만큼 갈증 나는 것이 연기예요."

하정우는 롤모델로 알 파치노를 꼽았다. “예전에는 로버트 드니로가 더 흥미로웠어요. 드니로는 자기복제를 가리기 위해 작품마다 굉장히 영리하게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디테일하게 변주해요. 반면 알 파치노는 ‘난 그런 건 신경 안 쓰련다’ 하며 주야장천 자기 스타일을 밀어붙이죠. 요즘은 알 파치노가 오히려 정답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요. 그 배우의 느낌을 토대로 캐릭터가 더 풍성해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는 이어 말했다. “어차피 연기라는 것이 금메달을 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내게는 평생 해야 할 직업이기도 하니까.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을 하며 다양한 시도를 할 겁니다. 계속 연마하며 정답을 찾아가야죠.”.  8월 1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