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33]협회 중재, 회원사가 중국측 물품 공동 인수

2016-07-11 09:00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33)
제2장 재계활동 - (28) 무역국(貿易局) 관리들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무역국이 신설된 것은 1946년 4월 30일로서, 무역협회 발족 석 달 먼저의 일이다. 상무부장에 오정수(吳楨洙), 무역국장에 최만희(崔萬熙), 차장에 조범행(趙範行), 그리고 수입과장에 황시연(黃時淵), 수출과장 임재각(任在珏) 등은 바로 협회가 주로 상대해야 했던 인물들이었다.

오정수(1899~1988년)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미국 메사추세츠 공대(MIT)를 나온 사람으로 원만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최만희 황시연 임재각은 모두 연전(延專, 현 연희대학교) 상과 출신들로서 영어에 능통했는데 그들은 모두 동창이란 인연으로 한 곳에 모이게 된 것이다. 국장 최만희는 조선도서(朝鮮圖書)에서 학용품 이출입(移出入, 한 나라 안의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화물을 옮기거나 들여오는 일) 무역 및 제3국 무역을 담당한 경험이 있어 실무에도 밝았고 상리(商利)에도 밝았다.

강성태(姜聲邰) 부장과 나익진(羅翼鎭) 부장은 상무부로 부장과 국장을 찾아다니면서 정부 방침에 쫓아 이사회 결정 사항을 집행해 갔다. 무역협회가 출범하면서 당면한 사업은 일방적으로 싣고 들어온 중국 정크선(船)의 수입물자 처리였다. 원래 무역협회 설립이 서둘러졌던 이유도 이들 정크선 하주들이 특정인 상대의 거래로 유리한 대상 물자를 폭넓게 구할 수 없는 불이익을 덜고자 미군정을 움직인 데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발족한 지 사흘 뒤인 8월 3일에 벌써 협회는 거래를 원하는 회원 업자들을 회동시키고 대책회의에 들어갈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수입품과 수출품과의 교환 비율이었으며 우리네 측은 모두가 원산지 가격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거래를 원하는 회원사들은 그들과 직접 부딪쳐 가격 조정을 하는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협회가 창구 역할을 맡아 양쪽 주장을 듣고 이견의 폭을 좁혀나가는 가격 조정 회의를 처음 연 것은 10월 2일에 가서였다. 견지동의 모 한약회사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회원 상사들은 개별적인 상품별 인수 교섭을 전개하느니 보다 공동 인수와 공동 판매로 대처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정크선 하주들도 그것을 원했다. 이에 따라 중국상품공동인수판매위원회(中國商品共同引受販賣委員會)가 조직되기에 이르렀고 회의는 연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양쪽은 배 단위로 일괄하여 팔고 사기로 합의한 다음 수입품과 대상품의 점검과 가격 협정에 들어갔는데, 가격은 국내 가격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10월 9일 최종 타협을 보기 위해 공동 인수 판매위원 박금(朴錦) 등 8명과 김도연(金度演) 회장 등 한국측 대표와 중국 상인 대표 4명이 인천 익태동(益泰洞, 화상(華商))에서 회합, 마침내 타결을 보았다. 그날 밤 중국 상인들은 연회를 베출어 거래 성립을 축하했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마치 큰 국제회의라도 치른 양 양쪽 대표들은 들떠 있었다. 이리하여 이틀 뒤 10월 11일 무역협회 회의실에서 양쪽 대표 사이에 상거래 약정서가 교환되었고, 원만한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다. 무역협회가 출범하여 이룬 첫 사업이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영천 집을 잃고 서울로 모여든 가족 문제 등으로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협회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몇 명 안 되는 직원에다가 회원 상사들이 제기하는 문제가 잇달아 일어나는 등 협회 업무는 폭주했다.

10월에 들어가자, 사과 산지인 대구의 청과물상들로 조직된 평과수출협회(苹果輸出協會)가 평과수출단(苹果輸出團) 결성에 대한 문제까지 협의해 왔다. 협회로서는 일단 임원회에 회부하기로 하고 10월 21일 조선식산은행(현 KDB산업은행) 별관 회의실에서 임원회를 개최했다. 수출시장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니고 해외 사정 형편에 대한 정보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처지에서 일방적으로 유리한 수출대상품이란 생각만으로 추진되는 것이니, 임원들 간에 의견이 속출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평과수출협회회의(苹果輸出協會議會)는 11월 4일 또다시 열리는 등 몇 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11월 30일에 가서야 평과수출협회와 평과무역단 사이에는 겨우 계약서가 교환되고 일단락을 지었다.

이런 가운데 한편으로는 무역조사단의 파견 문제가 구체화되어 갔다. 10월 18일 군정청은 대중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하여 상하이(上海)에 외교관을 주재시켜 통상(通商)을 보호케 한다는 발표에 이어 군정청은 상하이 출장소장을 임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발맞추어 상무부는 중국과의 무역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무역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계획했다. 그러자 무역협회는 협회대로 회원사 대표의 참가를 요청하였고 승인이 났다. 민간측으로서 2명이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역국(商易局) 무역과장 최만희를 단장으로 하여 미국인 고문관 2명, 협회 회원사 대표 장건식(張健植, 동아상사 전무)외 1인으로 구성된 5명의 조사단은 11월 23일 상하이로 출발하였다. 이들 일행은 홍콩, 마카오를 돌아본 후 돌아왔다. 이것이 해방 뒤 최초로 해외 무역 돌파구를 연 조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