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의 추모와 감사, 7월에도 이어가자

2016-07-05 08:55

[오제호]

경기북부보훈지청 선양담당 오제호

국가유공자에 대한 추모와 감사 그리고 화합과 단결을 위한 전국민의 간절한 노력이 이어진 호국보훈의 달이 지나갔다.

물론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훈과 국민화합은 시기를 불문하는 대한국인의 의무이지만, 호국보훈의 달만큼의 경건함은 다른 시기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6월에 시작된 6·25전쟁이 그친 것은 7월의 일이다.

특히 6·25전쟁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UN의 일원으로 받았던 것들을 생각하면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이 포함된 7월은 호국보훈의 달의 연장선상에서 UN참전국으로 확대된 추모와 고마움을 표하는 달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UN은 6·25전쟁 발발 당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해 북한의 남침을 평화의 파괴 및 침략행위로 규정했고, 27일에는 남침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한 참전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이에 대한 UN 회원국들의 지지는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1950년 6월 27일 미국 해·공군을 시작으로 영연방 등 주요국은 7월 초까지 일단의 병력을 파한했는데,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것이 군사(軍事)임을 감안하면 이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실로 신속하고도 고마운 결정이자 다행인 일이었다.

이들은 1950년 7월 5일 오산전투를 시작으로 인천 상륙 작전에서 6·25의 전환점을 마련했고, 흥남 철수 작전에서 10만 여의 대한국민을 살렸으며, 지평리·설마리·가평 전투에서 중공의 대공세를 저지했고, 피·단장의 능선 등지에서 치열한 고지전을 벌이는 등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참전 21개국(의료 지원 5개국 포함)은 파한 병력 연인원 194만 명 중 전몰자 4만여 명을 포함해 15만여 명을 잃었고 군수(軍需) 및 전후복구에 따른 막대한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전시·전후 물자지원은 파병국 외에 39개국에서 실시)

사실 이러한 희생은 6·25전쟁이 37개월간 지속되었고 동·서방을 아우르는 다수의 국가가 관여한 국제전이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참전 21개국이 위와 같이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하고 불사의 자세로 임전한 것은 기본적으로는 아시아 변방의 잘 알지 못하는 약소국을 지켜주고자 하는 박애정신의 발로에서 기인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 이들의 참전은 세계평화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는데, 1945년 국제연합 창설 이래 최초로 벌어진 평화 파괴 행위에 유엔헌장의 집단 안전보장 원칙을 처음으로 적용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들의 참전은 공산세계의 세계 적화 시도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정의로운 노력이기도 했다.

결국 종합하자면 UN참전국은 6·25전쟁 발발 소식에 신속하게 대한민국에 파병했고, 3년 간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남침의 격퇴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대한민국의 보전 및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정의도 구현해 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UN참전국에 큰 은혜를 입은 것인데, 이들의 베풂은 6·25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전후 대한민국의 복구와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국가 차원의 군사적 안전보장과 경제원조 외에도 한미재단 등 민간 차원에서 교육·의료·문화 등에 대한 도움이 지속되었다. 특히 이러한 민간 원조가 James Alward Van Fleet 장군, 참전국 참전용사회 등 6·25참전용사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그 수혜자인 우리를 다시 한 번 숙연케 한다.

이러한 이들의 은혜를 소학의 ‘은혜의 높음은 하늘과 같고 은덕의 깊음은 땅과 같다[恩高如天德厚似地]’란 말로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이렇듯 말로도 다 담아내기 어려운 이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나, 정작 이들이 바라는 것은 대한민국이 자신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6월의 분위기가 7월에도 이어져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