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의 차 한 잔] 부처님은 이번 '부처님오신날'에 오실까?

2016-05-14 06:19
칼럼니스트(문학박사)

제주도 성읍 민속마을 돌하루방.[사진=하도겸 박사 제공]


대한불교조계종 일부 권승이나 부패한 승려들의 모습이 대서특필되고 있다. 최근에는 ‘은처승’ ‘표절 총장’ 등 구체적인 신조어까지 생기며 이를 둘러싼 논쟁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급기야 조계종의 종립대학인 동국대를 '화가 나서 초가삼간까지 태워 불에 휩싸인 집'이라는 뜻의 화택(火宅)에 비유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와 ‘법조비리’ 그리고 북한 김정은의 ‘핵무기 보유선언’ 등을 보면 어딘들 화택이 아니겠냐고 할 수도 있다.

화택의 불을 끄기 위해 이 땅에 나투신 부처님 입장에서는 얘기가 달라도 참 많이 다르다. 다시 부처님오신날이 되었지만, 석가모니부처는 좀처럼 내려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모 종단의 폭력사태까지 포함해서 온갖 비리의 온상처럼 여겨지고 있는 불교계 종단들은 부처님의 제자를 칭하는 집단이다. 부처님도 체면이 있는데 어찌 불교계를 화택으로 만든 제자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부처님이라면 내려오지 않겠지만 자비로운 부처님이 만약 하늘나라 위에 계시다면 진즉 가방을 싸서 금강역사나 사대천왕뿐만 아니라 손오공, 저승사자들과 함께 내려올 준비도 하셨을 것이다.

거꾸로 내가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라면 권승이나 은처승, 폭력승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되었다고 해도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두려운 마음에 부처님이 안 내려오시길 바랄 것이다. 그게 맞다. 하지만 권승들과 관련된 일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 과정에서 부처님오신날이 몇 해가 반복되어도 나아진 게 없다. 징계는 없고 오히려 정화나 개혁을 주창한 이들은 종단에서 쫓겨나거나 강등되어 왔다. 그러는 걸 보고 타종교에서는 "부처님은 자비로워서 도깨비방망이가 아닌 솜방망이 또는 물방망이를 가지고 계신가보다"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이 땅에서 불자(불교신자)로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 왔다. "고려 멸망기 부패한 승려들의 모습도 이보다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한 기자의 말에 마음이 아려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금 불교의 그것이 아니다. 수행자들은 그냥 부처님 가르침대로 수행하면 될 것이다. 원활하고 효율적인 수행을 위해 종단이 만들어 진 것인데, 이 종단을 출가승려들이 독점하면서 신분화되는 왜곡된 형태가 됐다. 불교는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상층 계급이나 국회의원이 아닌 고통받는 서민인 중생을 먼저 구제하는 것과 상구보리(上求菩提), 즉 망상을 버리고 하화중생의 원천이 되는 깨달음을 구하는 종교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불교는 부처님이 아닌 마구니의 손을 참으로 자주도 잡았다. 지금도 그런 듯해서 안타깝다.

요즘 여러 곳에서 "참선하는 수좌들이 나서야 한다"고 한다. 한 신도는 "손에 흙도 묻히지 않고 신도들이나 권승들의 밥을 받으며 참선하는 수좌들은 정말 고고한가? 그런 밥을 먹고 가부좌를 한다는 것을 부처님은 알고 계실까? 아니 그런 부끄러움을 수좌들은 아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이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누구나 자기 역할과 일을 갖고 있다. '무늬만 선승'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깨침을 얻고 사자후를 토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지금 시절에는 성철스님·수월스님 같은 분이 여러 명 나와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그건 그런 분이 나오지 않아서 하는 말일 뿐, 살아있는 선지식이 출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줍잖게 깨달음을 노래하는 원로, 중진 승려들이 있지만 그건 사자후가 아니라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다. "돌아가신 선지식을 우려먹는 마케팅도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신도들의 말도 종단은 경청해야 한다. 이 땅에 진정 필요한 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상구보리한 선지식의 출현과 하화중생하는 보살의 출현일 따름이다.
 

경복궁 향원정.[사진=하도겸 박사 제공]


수행·깨달음 그리고 불교개혁·정화는 서로 다른 두 가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성질의 것도 아니다. 하화중생의 불교개혁을 한다고 깨달음이 얻어지지는 않는다. 정화를 한다고 해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개혁을 원한다면 그건 불자 수행자가 아니어도 된다. 아무리 화택 안에서라도 수행은 해야 한다. 오히려 화택이기에 보다 간절한 수행이 가능하다. 지금의 아수라판 같은 현실은 모두 부처님이 베푼 자비로 부처님의 안목과 예정된 계획이기도 하다. 이런 시절일수록 보다 더 용맹정진해야한다. 설사 일부 권승들의 더러운 돈으로 선방에 가부좌하고 앉아 있더라도 깨달음을 얻는 이가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이며 그것이 가장 큰 개혁정화 불사임에 틀림없다.

개혁정화에 앞장선 이들도 보살이다. 하지만 수행보다 종단 개혁에 참여하라고 참된 선승들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 뭔가 이뤄지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건 우리들의 안목이 부처님의 만분의 일도 못 쫓아가서 벌어지는 일일 따름이다. 이미 사회와 종단은 충분히 정화되고 개혁되고 있거나 그런 열망을 갖고 있다. 세상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로바로 결말 지어지지 않는 법이다. 역사의 장구한 물길은 시절인연과 같아서 마음대로 흐름을 조정해도 안 되며 조정되지도 않는다. 오염된 물도 결국 정화되어 가며 바다로 흘러간다.

부처님의 뜻도 그런 것이다. 일부 권승이나 부패승들의 마지막 발악을 흥미진진하게 보고도 부처님은 미소를 짓고 계실 것이며 우리도 그렇게 지금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손오공이 날아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은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어차피 예정된 길로 가는 길에서 재가와 출가 모두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이기를 바라는 이는 묵묵히 자기 생활을 성실하게 수행처럼 정진해야 한다. 삶이 수행이라는 생활선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기념일을 따로 기리지 않아도 부처님은 항상 이 땅에 머물고 계신다. 부처님오신날은 권승들의 배를 불리는 날이 아니다. 굳이 큰 절을 찾지 말고 작은 절을 찾고, 또한 사찰을 찾기 보다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찾으면 더 좋겠다. 그게 부처님오신날을 참되게 기리는 것이 아닐는지. 

※ 이 칼럼은 사부대중 모두가 맑고 밝은 구도의 길을 가기 위한 자성과 쇄신 등 공익적 목적으로 전문가와 신도들의 염려와 우려를 전하는 형식으로 작성됐다. 이는 일방의 의견일 뿐 다른 해석과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