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부평역사박물관,‘한하운의 삶과 문학’주제로 특별기획전시

2016-05-12 11:56
천형의 시인, ‘한하운’의 생애와 가치관에 대한 재조명

아주경제 박흥서 기자 =인천부평역사박물관(관장:정진철)은 2016년도 상반기 특별기획전의 주제를 ‘癩詩人 韓何雲(나시인 한하운)’으로 선정, 특별기획전시회를 갖는다.

한센병 시인으로 알려진 한하운 시인은 부평 만월산 골짜기에 나환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죽는 날까지 펜을 잡았다.

반생을 살았던 부평을 떠나지 않고, 죽어서 파랑새가 되고 싶다던 시인이 41년만에 다시 부평으로 돌아온다.

모멸과 냉대의 땅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생의 가치를 아름답게 노래하였던 시인 한하운, 부평역사박물관에서 그의 생과 문학 그리고, 그의 도전적인 반생(半生)을 보냈던 부평의 이야기를 펼칠 예정이다.

나시인 한하운[1]


부평역사박물관은 (재)인천문화재단(대표이사:김윤식)의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소장해오던 한하운 시인의 친필 유고와 다양한 자료들을 해당 전시에서 공개하기 위해 협력하는 한편, 그 동안 세간에서 잊혀져왔던 시인의 행적을 영상, 신문, 문헌, 사진 등의 자료로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는 오는 5월 18일 수요일, 부평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첫 선을 보이며 8월말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한하운 시인은 그의 독특한 이력으로 문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문인이다.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에서 한종규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 시인은 젊은 시절 남부럽지 않은 가세에 전형적인 엘리트교육을 받고 자란 지식인이었다.

본래 수의축산학을 전공하여 도청 공무원 생활까지 하였던 시인은 17세가 되던 해 진단받았던 지병인 한센병 재발로 부모에게 받은 이름마저도 스스로 버린 채, 살아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이 없는 비참한 투병생활을 이어간다.

까닭 모를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무서운 질병과 사회로부터의 냉대에서도 시인이 모진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문학이었다. 시인은 나병 환자라는 처참한 생활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삶에 대한 애착’을 아름다운 시를 통해 노래하였다.

문둥이 시인이라는 독특한 유명세는 당대 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1949년 시인 이승철의 소개로 ‘신천지’ 4월호에 13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비로소 문학계에 입성한다. 이후, 그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生에 대한 讚歌(찬가)’는 활자화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생토록 시인을 괴롭혔던 나병은 그의 문학을 이루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했던 시인의 절망은 생의 욕망으로 이어졌다.

살기 위해 나섰던 투병생활의 고난과 사회로부터의 냉대는 ‘한(恨)의 문학’으로 표현되어 민족적인 감수성을 자아냈다. 허락되지 않는 삶을 이어가면서 시인은 자신의 글에서 ‘살고자 했던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절규에 가까운 시인의 ‘삶에 대한 애착’은 그의 문학 활동의 동력이었다. 한하운에게 시를 비롯한 문학은 평범한 인간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인 동시에, 하소연의 장이었던 것이다.

‘癩詩人(나시인)’이라는 독특한 유명세로 말미암아 자의반 타의반으로 수원 세류동 하천 변에 형성된 나환자 집단거주지에서 생활하던 무렵, 그의 일생에 큰 전환을 가져오는 사건에 직면한다. 바로, 정부의 나환자 수용소 통합 이주 방침이었다.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이룰 요량으로 정부의 교섭안을 받아들인 시인과 나환자 70여명은 1949년 12월 30일 경기도 부평의 후미진 골짜기로 터전을 옮긴다. 이때부터 한하운 시인의 부평 생활이 그의 한 많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시인은 부평에서 전국 각지로부터 몰려든 600명 나환자들의 생존을 책임지게 될 자치위원장직에 오른다.

시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전에는 나 하나 살기 위하여 문전걸식을 하였지만 인제는 600명을 대표하여 관청에 다니며 구걸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넘어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했던 사회활동가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부평에서 나환자들의 자활을 이어갈 수 있는 농장을 설립하고, 그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죽는 날까지 펜을 잡았다. 성계원이라고 불렸던 나환자 수용소를 대표하며, 나병 환자들의 감염되지 않은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부평 등지에 보육원을 설립한다.

부평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은 1952년에 설립하여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십정동의 신명보육원이 유일하다.

시인이 그토록 원했던 ‘새빛’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보육원에 초대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시인은 나환자 인권 향상과 복지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60년 자신은 한센병이 음성으로 판정되어 사회 복귀를 허락(?)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부평을 떠나지 않는다.

결국, 1975년 2월 28일, 지금은 아파트가 세워져 흔적조차 사라진 옛 십정동 자택에서 한센병이 아닌 간경화증으로 한(恨) 많은 생을 마감한다. 시인의 유택(幽宅)은 김포 장릉공원묘지에 마련되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하는 김정훈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하운 시인의 수준 높은 문학 세계는 물론이고, 한하운과 지역사회와의 짧지 않았던 인연을 지역주민들에게 널리 알려, 향후에도 한하운 시인을 추모하는 문화 사업들이 부평을 비롯한 여러 공간에서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2016년도 부평역사박물관 상반기 특별기획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515-6472)로 문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