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김은하 기자 = 알츠하이머를 앓는 변호사의 인생을 건 변론기라니…똑같은 소재의 SBS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이 종영한 지 불과 한 달 만이다. 꼭 ‘리멤버-아들의 전쟁’를 걸고넘어지지 않더라도 사랑의 헌신적인 희생을 강조하고 싶을 때나, 물욕만을 쫓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극적으로 그리고 싶을 때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아주 자주 알츠하이머를 이용했다.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무서운 속도로 기억을 갉아먹는 악랄함, 사그라지는 기억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은 환자의 비참한 사투, 그걸 지켜보면서도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주변인의 착잡함…tvN 금토드라마 ‘기억’은 알츠하이머의 유구한 심상을 착실히 반복·재생산한다.
견마난 귀매이(犬馬難鬼魅易), 개나 말을 그리는 것은 어렵고 도깨비 그리기는 쉽다. 사람들이 빠삭하게 아는 것을 잘해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실력이라는 얘기다. 1999년부터 호흡을 맞춘 박찬홍 PD, 김지우 작가는 그간 무수히 반복됐던 알츠하이머를 재료로 전혀 다른 서스펜스를 요리한다.
지방국립대 출신 변호사(이성민)는 권력자의 충성스러운 개를 자처하며 국내 최고 로펌의 에이스로 성장한다. 현모양처 아내(김지수)와 사랑스러운 아들·딸과의 행복한 앞날만이 남은 줄 알았는데, 알츠하이머란다. 기억해야 하는 것들은 숨 가쁘게 휘발되고 애써 외면했던 뼈아픈 과거는 선명해진다. 뺑소니로 잃은 병아리 같은 아들과 그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헤어진 전처(박진희)가 그것이다. 소멸되는 기억 앞에서 변호사는 기필코 잊지 말아야 하는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지질한 감성팔이나 전처와 후처 악다구니는 없다. 박찬홍 PD, 김지우 작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변호사를 통해 죄의식이 결여된 재벌가의 악마성, 그들의 편이 되기를 자처하는 저열한 법조인, “왕따를 당할 땐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하는 잔인한 공교육을 들춘다. 한 개인의 아픔에 들이댄 현미경은 어느새 사회를 조망하는 망원경이 된다.
드라마의 다층성을 완성하는 건 배우의 몫도 크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며 처절하게 헌법을 읊어대는 것으로 알츠하이머에 걸린 절망을 단박에 전달하는 이성민, 낙담과 비참함을 담은 처연한 눈빛을 하고서도 애달픈 미소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김지수, “우리 아들 앞으로도 잘 보필해 줘요”라는 일반적 인사를 겁박의 언어로 재탄생시킨 문숙까지 명연은 주·조연을 가리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뻔한 식재료를 디테일이 어떻게 요리해내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레시피로 ‘기억’될 것이다. “화창한 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일각의 평가는 우직한 집념을 칭찬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