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정민철, 90년대를 지배했던 오직 한 명의 투수

2016-01-22 14:38

[사진=한화 이글스 제공]

아주경제 서동욱 기자 = 팬들은 때때로 시대를 지배한 선수 꼽곤 한다. 80년대의 최동원·선동열의 라이벌전은 프로야구 최대 화제거리였고, 2006년 이후 류현진은 한국 프로야구의 자랑이 됐다. 하지만 90년대를 말하면 늘 이야기가 갈린다. 누구는 정민태라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임창용을 거론하기도 한다. 모두의 가슴속 ‘최고’는 주관적인 것이겠지만 기록이 말하는 최고는 정해져 있다. 90년대 최고의 투수는 바로 한화 이글스의 레전드 정민철이다.

90년대 초까지 프로야구는 선동렬의 시대였다. 그는 1990년 190⅓이닝을 던지며 22승을 쓸어 담고 삼진을 189개나 잡아내는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다. 1991년은 더 했다. 203이닝을 던졌고 19승을 거두는 동안 무려 210탈삼진을 기록했다.

하지만 92년 건초염을 기점으로 그는 불펜으로 전환했다. 그 해 초 개점 휴업했지만 이후에도 100이닝 이상을 꾸준히 소화하는 괴물 마무리로 변신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다.

하지만 그가 떠난 리그 에이스 선발 투수 자리는 공석이 됐다. 누가 그 자리를 메울지는 당시 프로야구 최고의 이슈였다. 한용덕, 송진우, 조계현 등 전성기를 구가하던 많은 투수들이 언급됐다. 하지만 92년 프로야구를 지배한 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두 명의 신인 투수였다. 바로 염종석과 정민철이 그 주인공이었다.

김태균·정근우·추신수·이대호 이전의 황금 세대로 불리는 임선동·조성민·박찬호·염종석·정민철 중에서 오히려 덜 주목 받은 편이었던 염종석과 정민철은 프로 입단 후 바로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염종석은 데뷔 첫 해 무려 204⅔이닝을 던지며 17승 9패 6세이브, 방어율 2.23의 성적을 거두고 팀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시킨 후 신인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이후 염종석은 데뷔 시즌 가을 야구까지 합해 230이닝 이상을 던진 혹사 후유증으로 부상에 시달리며 마운드에서 사라졌다.

결국 90년대를 지배한 투수는 한화의 정민철이었다. 정민철은 비록 데뷔 해에 염종석의 괴물 같은 페이스에 신인상을 내줬지만 195⅔이닝 동안 14승 4패 7세이브, 방어율 2.48을 기록하는 MVP급 활약을 펼치며 리그 이닝 3위, 방어율 2위, 탈삼진 2위의 성적을 거뒀다.

정민철은 무엇보다 꾸준한 투수였다. 92년부터 한국에서 뛴 99년까지 그는 평균 188이닝을 던지며 8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했고, 109승 62패를 거뒀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시즌을 150이닝 이상 던졌고, 4시즌은 200이닝을 넘기기도 했다.(94, 96, 97, 99)

여기에 완투도 밥 먹듯이 했다. 데뷔 시즌과 이듬해 2시즌 연속 10완투를 기록한 후 일본 진출 전까지 59번이나 경기를 끝까지 책임졌다. 90년대에 그보다 많은 완투와 완봉(19)을 한 투수는 없다.

이렇게 많이 던지면서도 그는 2점대 초반에서 3점대 중반의 방어율을 유지했다. 94년에는 방어율 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8년간 그의 평균 자책점은 2.80에 불과했다. 역시 90년대 그보다 낮은 방어율의 투수는 한 명도 없었다.
또 그가 데뷔한 92년부터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해인 99년까지 기록은 다승, 탈삼진, 이닝, 방어율, WHIP, 완투, 완봉승 부분에서 모두 리그 1위였다. 가히 리그를 지배했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선동열은 일본 진출 이후 자신의 후계자로 정민철을 지목한 바 있을 정도로 정민철의 구위는 훌륭했다. 150km를 넘는 직구와 특유의 긴 손가락을 활용한 폭포수 커브는 타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야구 천재’ 이종범은 본인이 상대한 최고의 공으로 정민철의 직구를 꼽았으며 20년이 넘는 시간 동은 많은 투수들의 공을 받아본 포수 박경완도 2007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받아 본 공들 중에서 최고는 정민철의 직구였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정민철은 제구력도 좋은 편이었다. 그 강력한 직구를 스트라이크 존 곳곳에 찔러 넣었다. 일본에 진출하기 전 그의 삼진/볼넷 비율은 3.05에 달했다. 현재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제구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 윤성환이 3.17을 기록한 것을 보면 빠른 볼에 제구력까지 갖췄던 정민철이 얼마나 강력한 투수였을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팔꿈치 통증으로 98년도 148⅓이닝 동안 10승 7패, 방어율 3.16을 거두며 부진(?)했지만 이듬해인 99년 다시 201⅔이닝을 던지며 18승을 거둬 한화 이글스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으로 떠났지만 부진하며 2년 만에 국내로 리턴했고, 전성기 시절의 혹사로 인해 그 구위를 잃은 채 기교파 투수로 변신해야했다.

스포츠와 그 기록은 보는 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때론 이견이 없는 드문 경우가 있다. ‘압도적인’ 투수가 나왔을 때가 그렇다. 정민철은 신인상도 MVP도 받지 못했고, 정민태나 임창용처럼 단기간 집중 주목을 받은 적도 없지만 늘 강하게 타자를 제압했고, 팀에 가장 도움이 되는 투수였다. 그러나 그가 전성기 시절 한국에서 뛰었던 8년을 돌아보면 결국 그보다 강했던 투수는 없었다. 리그를 ‘지배했다’는 표현은 그와 같은 투수에게 쓰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