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G2 중국경제의 조타수가 된 베이징대 천재
2015-10-30 18:03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1955년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에서 태어난 리커창 총리는 어릴때부터 지역에서 소문난 수재였다.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혼란에 빠져들었고,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친구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홍위병이 되었지만, 리커창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안후이성 문사관(文史館)에서 일하던 리청(李誠·1906~77)을 찾아가 제자가 됐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사기’ ‘한서’ ‘후한서’ ‘자치통감’ 등 중국고전은 물론 천문학 지리학까지 배웠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1974년 안후이성 펑양(鳳陽)현으로 하방됐다. 펑양현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고향이다. 1977년 대입시험이 부활하자 22세의 리커창은 명문 베이징대에 지원했다. 10여년동안 대입시험이 없었기에 그해 베이징대에는 지원자가 폭주했다. 무려 29대1의 경쟁률을 뚫고 리커창은 베이징대 법대에 합격했다. 졸업할 때는 법학과 우수생 4명중 한명으로 대표시상을 받았다.
◆대학졸업후 현실정치 투신
후 전 주석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그는 차기 중국의 리더로서 지방정부에서 정치경력 쌓기에 나섰다. 1998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허난(河南)성 성장으로 자리를 옮겨 행정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4년후인 2002년 허난성 서기를 꿰찼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랴오닝(遼寧)성 서기로 근무했다. 지방정부 시절 리커창은 큰 뜻을 품었던 만큼 청렴한 자세를 견지했다. 공무와 관련된 연회가 아니면 정중히 거절했으며, 특별한 일이 없으며 대부분 비서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2006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현지 관리들이 보낸 선물을 완곡하게 거절해 돌려보내는 등 철저한 자기관리를 했다.
◆국가주석 유력후보였지만
2010년 2월초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개최한 토론회에서 리커창은 “중국은 이미 경제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발언했다. 당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2003년 취임초기 '빠르고 좋은 성장(又快又好)'을 강조하다가 후반기에는 '좋고 빠른 성장(又好又快)'을 모토로 내걸었다. 빠른 성장을 추구하던 시기였다. 리커창은 차기 총리로서 빠른 성장 대신 구조조정을 추진할 것임을 공표한 것이었다.
◆안정성장과 구조조정 사이에서
이후 그는 예정대로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서열2위의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 오른 후 이듬해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총리로 선출됐다. 총리 취임후 그는 '안정성장과 구조조정(穩增長,調結構)'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리커창 총리는 취임후 여러차례 가진 외신기자회견에서 "구조조정 없이는 미래 중국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고, 안정성장 없이는 현재의 사회안정을 지킬 수 없다"며 "구조조정과 안정성장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게 나의 가장 큰 임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리커창 집권 3년째인 올해 중국은 성장률 둔화와 주가급락 물가하락, 공급자물가 저조, 투자부진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명확한 비전제시와 흔들림없는 정책추진, 소통능력 등은 그가 지닌 명확한 강점이다. 그가 키를 쥐고 있는 '중국경제'라는 거대한 함선이 순항할지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