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대한민국 군인 - 군바리 혹은 국방의 역군

2015-09-30 18:50

[오제호]

의정부보훈지청 선양담당 오제호

최근 미국 항공기에서 제복의 구겨짐을 염려하여 이를 옷장에 보관해달라는 미군의 요구를 ‘옷장은 일등석 승객에게만 제공된다’며 승무원이 거절하자, 주변의 일등석 승객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군인에게 양보하겠다며 승무원에게 항의한 일이 있었다.

국가수호에 헌신하는 군인에게 있어 그 생명과도 같은 명예는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미국인들의 군인예우 의식이 잘 드러난 일화이다. 한편으로는 전쟁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는 국군에 대해 ‘군바리’라는 비칭(卑稱)이 일상화된 우리나라와는 다소간의 온도차가 존재함을 느낄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이에 아래에서는 군인에 대한 비칭이 만연하게 된 이유와 이러한 현상이 합당한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보고자 한다.

사실 군바리의 어원은 불분명하다. 남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시다바리와 군인이 합쳐져 형성되었다거나, 다리가 짧은 애완견을 가리키는 발바리와 군인이 합해져서 형성되었다는 등의 설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군’과 합성된 ‘바리’라는 용어는 군인을 비하하거나 군인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용어인 점이다.

이러한 군인에 대한 비칭이 만연한 데에는 과거 독재정권과 관련이 깊었던 군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군 일각의 병영 부조리·방산 비리 등도 군에 대한 일반의 부정적 인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매도가 합당한 것인지를 따져보려면 정부가 수립된 1948년부터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해온 역사를 회고해 볼 필요가 있다.

매년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국토의 팔할을 잃어 망국의 위기에 봉착했던 전황을 기적적으로 역전시켜, 조국통일을 위한 북진을 최초로 감행한 국군의 위용을 과시하고 장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정한 국가기념일이다.

10월 1일의 기적은 유엔군에 힘입은 바 크지만 국군의 굳건한 위국헌신에의 의지가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1950년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 중이던 맥아더 장군에게 ‘상관의 철수명령이 없는 한 죽는 순간까지 방어선을 지키겠다’는 국군 병사의 단언은 불리한 전황을 불굴의 투지로 타개한 국가수호 의지의 결정체(結晶體)였다.

이러한 국군의 본분은 비단 6·25 전쟁에서만 발현된 것은 아니었다. 1949년 5월 4일 북한군의 대남 기습으로 빼앗긴 송악산 일대 4개 고지에 대한 탈환작전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가자, 서부덕 이등상사 등 10인은 폭탄을 가슴에 품고 돌진해 적의 진지를 파괴하여 고지탈환 및 북한군 격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몸소 실천한 이들을 우리는 육탄십용사로 기억한다. 뿐만 아니다.

두 차례에 걸친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사건, 천안함 폭침사건, 김신조 사건 등 북한은 광복 이후 삼천여 회에 걸쳐 전투 혹은 그에 준하는 폭력도발을 가해왔다. 이때마다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완수한 국군이 있어, 우리는 65년 전과 같은 전화(戰禍)를 재차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의 군인이 ‘군바리’인지 ‘국방의 역군’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을 것이다.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헌법 제5조 2항에 명시된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사명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충실히 수행해 온 주체가 바로 국군이다. 국가에 의한 사명이란 곧 국가수호이기에, 이를 수행하는 국군은 광의의 국가유공자로서 존경과 예우의 대상이 된다.

물론 국군에 대한 비칭을 야기해온 불합리의 개선을 위한 건설적 비판도 필요할 것이나 국군에 대한 낙인효과를 야기하는 맹목적 매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국가를 수호한다는 명예가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군인에게 불합리한 낙인은 군 사기 감소·안보력 저하·국민의 국가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군바리’라는 무심한 말 한마디는 철책선 초병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방력 약화를 통한 간접적 이적행위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