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금관총 재발굴, 망자와 부장품 땅에 안묻었다

2015-06-23 14:10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 조사내용 공개

[금관총 전경]

[금관총 전경]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이 무덤은 5세기 말~6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왕을 비롯한 당시 신라 최고위급 인물이 묻힌 이 무덤은 축조하는 과정에서 나무를 엮어 만든 구조물인 목가구 흔적이 확인됐다.

 경주 금관총이다. 일제강점기 1921년 9월 경주 노서리의 한 주택을 수리하다가 우연히 금관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무덤으로 유명하다.

1921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조사 당시 이미 봉분 상당 부분이 없어진 금관총은 이번 조사 결과 경주분지 일대 다른 적석목곽분과 마찬가지로 망자와 부장품을 지하에 묻지 않고, 지상에 나무덧널(木槨)을 만들어 놓고 그 주변으로 망자와 부장품을 넣는 장례를 치른 다음에 나무덧널 위와 사방 주위를 큰 강돌로 두껍게 쌓은 것으로 드러났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자료 공개 사업 중 하나로 지난 2월23일 이래 금관총을 발굴조사한 이 같은 내용을 23일 공개했다.

 이번 발굴은 일제가 급히 부장품만을 수습하고 끝낸 것에 비해, 해방 이후 축적된 우리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조사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지하 물리 탐사와 같은 체계적인 조사 방법을 동원해 금관을 비롯한 부장품 출토 공간을 사전에 확인했고, 무덤 구조와 관련한 새로운 정보의 수집과 당시 수습하지 못한 부장품도 일부 발견하는 성과를 냈다.

국립중앙박물관은은 무엇보다 이번 발굴에서 주목되는 성과는 일제가 당시 완전히 조사하지 못했던 금관총의 돌무지 구조를 확인한 점이라고 밝혔다.

 조사단은 돌무지 구조의 평면 형태가 모서리를 없앤 한 변 20m의 네모 형태임을 확인했고, 돌무지를 쌓기 전 목조가구(나무를 이용해 기둥을 세우고 가로를 연결해 바둑판 모양의 틀) 시설을 한 흔적을 발견했다.

 목조가구 시설은 황남대총에서 확인된 바 있으나, 목조가구를 짜고 그 안에 돌무지를 축조해 가는 과정을 차례대로 복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발짝 진전된 조사 결과를 도출했다. 또 돌무지의 단면 형태가 50° 정도 경사의 사다리꼴 형태임이 밝혀져 지금까지 돌무지 단면 형태에 대한 학계의 논쟁을 정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했다.

또 조사단은 망자와 부장품이 있었던 나무덧널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제기했다.

 일제 연구자는 덧널이 하나이고(단곽식), 크기는 길이 4.8m, 너비 2.1m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고고학계는 금관총의 나무덧널의 수와 크기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이번 발굴에서 나무덧널 아래 깔렸던 자갈층의 범위가 길이 5.7m, 너비 3.0m 정도임을 확인했다. 금관총 나무덧널의 크기 또한 일제 연구자가 제시한 것보다 크다는 점이 확인됐다. 
 

[은제 허리띠 장식]


 조사단은 이번 발굴에서 나무덧널 주변의 흙을 물 체질한 결과, 유리그릇, 은제 허리띠 장식, 유리구슬, 금실, 달개 장식이 달린 금실과 같은 부장품을 찾았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황금에 버금가는 귀중한 재료인 유리그릇이다. 비록 작은 조각만이 확인되었지만, 코발트색의 유리그릇 편은 당시 보고서에 없는 것으로 새롭게 확인된 부장품이다.

 조사단은 "이와 거의 같은 유리그릇 편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출토되어 앞으로의 비교 연구가 주목된다"며 "은제 허리띠 장식도 일부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일제강점기 보고서에 없으므로 새롭게 발견된 유물"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