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의 아트Talk]사석원의 '고궁보월'전, '물감 묻을라' 펜스 둘러
2015-06-12 10:21
12일부터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서 3년만의 개인전 '물같밭'같은 작품 눈길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회장이 걱정스런 표정을 한채 직원들의 동의를 구했다. 중견작가 사석원의 그림이 걸린 전시장을 한바퀴 돌고 난 후 였다.
12일 서울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사석원의 개인전 '고궁보월'전은 '물감 천지'다. 가까이서 보면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물감을 그대로 짜놓은 듯, 두툼한 물감덩어리만 가득하다. '그림을 보다 자칫 물감이 묻거나, 만져질까' 하는 이호재회장의 우려로 그림앞엔 울타리가 쳐졌다.
3년만에 전시장에 들어온 사석원의 그림은 더 강렬해졌다. 걸린 그림도 40여점이나 된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그림만 그렸다"는 작가는 "3년이라는 시간 덕분에 물감을 원없이 썼고, 많이 말라 걸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물감이 잘 마르지가 않아요. 0.5mm 마르는데 6개월이 걸리죠. 아마 제 작품의 물감이 다 마르려면 100년정도 걸릴 거예요."
이번엔 특히 '물감밭'이다. '물감으로 빚은 형상' 날 것의 생생함이 강력하다. 작가는 "왕실의 위엄과 궁궐의 단청의 화려함을 나타내기위해선 두터운 질감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물감의 양의 따라 정조 이후 조선의 몰락, 쇠락하는 조선의 극단적 대비를 표현했다"고 말했다. 사석원만의 강렬한 원색과 힘있는 봇놀림, 거친 마티에르는 캔버스위에 600년 조선왕조사의 위엄과 번영, 좌절과 슬픔이 섞인 숨겨진 옛 이야기가 웅장하고 드라마틱하게 담겼다.
전시 타이틀은 '고궁보월전'(古宮步月). '옛 궁에서 달의 그림자를 밟는다'는 뜻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수없이 많은 날들을 달빛 아래서 서성거렸다. 그 분들이 살았던 시대의 주군인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고뇌놔 또는 희열에 들떠서 달의 그림자를 밟았을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고궁에서 조선의 역사를 생각해냈고 그 시대에 문예 부흥기를 이끌어낸 정조, 근대화를 꿈꾼 고종 등에 주목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서울토박인 그는 "어려서 놀던 곳이 경복궁, 창덕궁이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내내 조선의 궁궐을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역사 속을 기웃거렸다. "줄 곧 궁을 비추는 달처럼 궁 안 풍경을 은근한 시선으로 내려다 보고 싶었다"는 그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이 세상 최초, 최고의 슈퍼울트라 CCTV"라고 했다. "우리가 달을 보듯이 달도 우리를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빛이 모든 이에게 따뜻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진달래, 개나리를 떠올리는 봄날 풍경이 있고 눈 오는 날 모습도 보인다. 하나의 그림에 두 개의 계절이 보이기도 한다.
눈 내린 경복궁에선 흰 사슴이 뛰어다니고 덕수궁에선 사자 가족과 부엉이가 같은 캔버스에 앉아있다.
작가는 "이전에는 제 작품에서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동물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고궁의 비장함을 나타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물감밭' 작품은 지난 2007년에 등장했다. 당시 '만화방창'전이 압권이었다. 역동적이며 현란한 원색의 금강산을 소재로 한 그림은 물감의 강렬한 흔적으로 컬렉터들을 매료시켰다. 거침없이 척척,일필적으로 그려낸 붓질과 튜브에서 바로 짜내 칠해진 그림은 '고루했던 한국화'를 호방하면서도 '품격있는 현대회화'로 확장하며 사석원의 주가를 상승시켰다.(현재 작품값은 100호 크기 경우 4500만원선이다)
'서양화 같은 한국화가.' 동양화과 출신으로 유화물감으로 그리는 그에게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질문이다. 사석원에게 이제 '한국화냐 서양화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는 "동양화가라고 불리기를 원한다"고 했다.
'동양화 붓으로 유화물감을 칠해 그린다'는 그는 끝이 반듯한 서양화 붓과는 달리 둥글고 뾰족한 동양화 붓은 유화를 묻히면 한번 쓰고 버린다"면서 "동양화적 기법이 몸에 기억돼 어색하지 않다"고 했다.
"동양화는 골법용필(뼈가 있는 획) 선의 예술이죠. 이젠 유화든 수묵이든 저절로 붓질이 되는 것 같아요." 동양화처럼 눕혀서 그린다. 화폭에 바로 튜브의 물감을 섞지않고 직접 캔버스위에 짜서 단박에 그려낸다.
그는 전시도록에 서문을 쓴 손철주씨와 인터뷰에서 동양화가로서 비장함을 보였다. "내 생애에서 해야 할일은 확실하다. 동양화 기법으로 서양 재료를 써서 동물을 통해 그 무엇을 조형화 하는 것. 여생을 거기에 목매달고자 한다. 화가로서 지금 내 나이가 아주 좋은 나이다."
이번 전시에는 마치 한국화같은 유화로 그린 흑백의 모노톤 작품도 나왔다. 강렬하고 화려한 원색의 그림과 달리 스산한 붓질과 고즈넉한 색채로 '아름다운 적조미'를 전한다.
또 2층 전시장 맨 구석에 걸린 하얀 색으로만 그린 '매화' 그림은 '한국적인 미', 궁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조선은 509년동안 유교이념이었죠. 그걸 한가지 색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흰색이라고 생각했어요." '희꾸무레한'색이 진창인 화폭은 화려했지만 쇠락해진 조선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전시는 7월 12일까지. (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