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서 나온 이재용 부회장 “나는 삼성이다”

2015-05-10 13:52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남궁진웅 기자]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지난 2007년 1월 7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라스베이거스 발리하이 클럽.

다음날 개최하는 세계 최대 가전 박람회인 ‘국제가전전시회(CES)’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기자단과 최지성 삼성전자 디지털 미디어 사장(현 삼성 미래전략실장, 부회장)과의 간담회가 시작되기 직전, 예상치 못했던 한 사람이 모습을 보이면서 현장은 술렁거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략기획팀 상무가 깜짝 등장한 것이다. 1991년 삼성전자 총무그룹에 입사 후 2001년 임원인사에서 경영기획팀 상무보, 2003년 상무 승진 등을 통해 존재를 알리긴 했으나 언론과의 만남은 전혀 갖지 않았던 그가 삼성에 몸을 담은지 17년 만에 공식석상에 드러냈던 것이다. 10여분의 시간 동안 간담회장에 머물며 기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사진도 함께 찍는 등 그동안의 벽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그는 인사말을 통해 “인간적으로나 회사 안에서나 커리어 개발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으니 많이 지켜봐주고 도와달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그 날이 사실상 삼성의 후계자 수업을 본격화한 첫 발걸음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날 이후 단행된 임원인사에서 전무로 승진했고, 2009년 부사장, 2010년 사장(이상 최고운영책임자)에 이어 2013년 부회장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또 다시 언론 앞에 먼저 나서지 않았다. 아버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08년 경영일선에서 퇴진하며 삼성의 쇄신작업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2010년 이 회장이 복귀한 다음부터는 아버지가 추진하는 뉴 삼성 작업의 원활한 추진을 지원하는 역할에 충실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이 부회장의 리더십에 의문을 던졌다. 이 회장은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 회장이 생전에 후계자로 낙점 받은데 비해 이 부회장은 언질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권을 물려받기 위한 능력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 회장의 그늘 안에 머물러 있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불과 1년 사이에 이 부회장에 대한 우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지난해 5월 10일 이 회장의 갑작스런 와병으로 삼성그룹이 경영공백 상태에 빠지는 게 아니냐고 불안해 했지만, 이 부회장의 본색은 그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회장의 지침으로 시작된 그룹 전사 차원의 조직개편, 사업구조의 변혁, 글로벌 경쟁기업과의 갈등 등 첨예하고 대립되고 실타래 같이 얽힌 문제들을 이 부회장은 특유의 유연한 사고력과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친근감, 유창한 대화술로 하나씩 해결해냈고, 해결해 나가고 있다.

아버지처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갖추지 않은 대신,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강점으로 최고경영자(CEO)를 뛰어넘어 ‘리더’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회장이 주창한 ‘마하경영’의 지향점을 가장 잘 아는 이 부회장이 이를 실천함으로써 삼성은 이 회장의 공백 속에서도 조직력은 더욱 강화됐고 의사결정체제는 한층 빨라졌다.

8년전 “커리어 개발을 많이하겠다”던 그의 발언이 던진 의미는 이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이 부회장은 자신감 있게 앞에 나서고 있다. 후계 구도 문제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이 부회장이 스스로 “나는 삼성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하나씩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