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리뷰: 허삼관②] "너는 내 운명" 하정우·안동규·NEW·민무제 그리고 하지원

2015-01-12 14:32

영화 '허삼관' 스틸컷 [사진 제공=NEW]
 

# 아주경제 홍종선 기자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로 신성의 출현을 알린 하정우가 그보다 13년 앞선 1992년, 동명의 영화로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한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영화 <허삼관>(제작 ㈜두타연·㈜판타지오픽쳐스, 감독 하정우)을 주연·연출한 것은 어쩌면 운명이다.

이스트우드의 영화에는 총격 장면도, 고수의 총잡이 영웅도 없다. 마카로니 웨스턴의 대부였던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활약했던 서부극의 폭력성을 스스로 반성했다. 하정우는 영화 외적으로 느껴온 아쉬움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소통의 부재 속에 즐겁게 시작해 지치며 끝나는 한국영화의 고된 현장을 반성하고 거대 배급사, 막강한 제작사의 입김 대신 배우와 스태프의 입장을 생각하는 감독을 현장에 들였다. 하정우의 입으로 밝힌 적 없지만, 현장에서 만난 단역 배우들과 제작진에게 들은 얘기다. 허삼관의 장인으로 영화를 함께한 이경영이 하정우를 두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됐으면 좋겠다”며 배우 겸 감독으로 성장하기를 응원한 이유, 분명히 있다.

[아주 리뷰: 허삼관①] 하정우의 이름은 잊어도 좋다, 웰메이드 수작 <허삼관>
 

영화 '허삼관' 스틸컷 [사진 제공=NEW]


여러 운명이 자연스레 합류하는 지점에서 거사가 이뤄진다 했던가.

<허삼관>에는 배우 하정우의 감독 운명뿐 아니라 여러 인물들의 운명이 도래했다. 먼저 제작사 두타연의 안동규 대표. 안 대표는 매년 저작권료를 주며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15년간 품고 있었지만 여러 난제 속에 영화화의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한 편에 10억원의 저작권료를 받는다는 위화가 15년간 2억원을 나눠 받으며 안 대표를 기다려 준 것도 <허삼관> 탄생에 일조했다. 이 사연은 하정우의 귀에 들어간다. “하나의 작품을 15년간 포기하지 않다니, 말 그대로 안동규라는 사람 일생의 영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하정우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이라는 마음으로 주연을 수락한다. 이때 신의 한 수를 더 두고자 하는 이가 있었으니 <허삼관>의 프로듀서를 맡은 장원석이다. 하정우의 첫 번째 연출작 <롤러코스터> 현장을 제 집 드나들듯 했던 그는 '하정우 연출'의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강산이 바뀌는 시기에 맞춰 짧지 않은 연기생활에 한 번의 매듭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배우 하정우는 신인감독이 되기로 결심한다. 낮에 주연배우를 수락한 날, 밤 11시에 내린 결론이다. '허삼관 매혈기'를 영화로 만들 안동규 대표의 운명은 그렇게 하정우, 장원석을 통해 역사가 됐다.

제공과 배급을 맡은 NEW가 <허삼관>을 만난 것도 운명이다. 2013년 <변호인> 1136만명, <7번방의 선물> 1200만명 등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양적으로 국내 배급사 2위의 성적을 기록했던 NEW는 <감시자들>과 <숨바꼭질>로는 영화에 대한 질적 안목을 호평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남자가 사랑할 때><인간중독><빅매치><패션왕>을 야심 차게 선보였지만 모두 200만 이하 관객의 선택을 받았고, <해무>의 작품성으로 체면을 유지했다. 절치부심 재기를 노리는 NEW가 새해 첫 영화로 선보이는 게 <허삼관>이다. NEW의 장경익 대표는 “하정우는 선물”이라고 반기며 “영화를 배급하다 보면 맘에 차는 것도 있고 부족하다 느끼는 것도 있는데, <허삼관>은 저부터 좋아하는 영화”라며 함께한 것에 대해 만족감을 드러냈다. 또 지인이 전한 <허삼관> 관람평, “NEW is back”(뉴가 돌아왔다)도 들려줬다. 배급사 NEW가 드디어 제 색을 찾았다는 호평에 장 대표는 환히 웃었다.

민무제가 <허삼관>으로 배우가 된 것도 운명이다. 연극영화과에서 동문수학하던 시절, 카리스마와 남성미로 하정우에게 질투심을 안길 만큼 힘 있는 연기를 하던 민무제는 배우 되기에 앞서 졸업여행 삼아 떠났던 유럽배낭여행에서 졸지에 주저앉고 만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갑작스레 가장이 돼야 했던 그는 바로 그때 여행 중이던 이탈리아에서 가이드가 됐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제품을 팔기도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하며 10년을 보냈다. 생활인으로 살며 접었다고 생각했던 꿈이 파닥거릴 즈음 하정우에게서 출연 제의가 왔다. 어떤 영화인지, 어떤 역할인지 묻지 않고 모든 걸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도 연락을 이어왔던 하정우에 대한 믿음이었다. 감독 하정우가 준비한 것은 하지원의 애인이자 허삼관이 끔찍이 아끼는 첫째 아들 일락(남다름)의 친아버지로 한바탕 소통의 발단이 되는 하소용 역이다. 연기파 전혜진의 남편이기도 한 제법 큰 역에 신인을 기용한 하정우의 눈은 정확했다. 
 

영화 '허삼관' 스틸컷 [사진 제공=NEW]


그리고 하지원이 허옥란이 된 것도 운명이다. 하하 커플(하정우-하지원)이 영화 속에서 허허 부부(허삼관-허옥란)가 된 것도 재미있는데, 옥란이는 나이를 잊고 아름답게 삼관이네 동네 사내들의 마음을 후린다. 하지원으로 말하자면 원톱으로 작품을 책임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배우 중 한 명이고 흥행에 있어서도 기본 이상은 하는 착실한 배우다. 다만 책임이 부른 부담감의 결과인지, 어느 작품이라 할 것 없이 부릅뜬 눈에는 힘이 들어 있고, 몸짓에는 절도가 넘쳤다. 중성적 매력으로 치면 따를 자가 없지만, 여성스러움이 덜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지원은 신인감독 하정우를 택하는 과감성 덕에 기존의 독기와 억척을 말끔히 지우고 천생 여자가 됐다. “여배우는 첫 번째 엄마 역을 어떻게 하느냐가 향후 배우 인생을 결정한다. 기왕이면 조금 당겨 하는 게 좋고, 이왕이면 부드럽고 따뜻한 역할이 좋다”는 감독 하정우의 진심어린 조언이 하지원의 허옥란 되기를 가능케 했다. 소박한 의상이지만 몸매선과 색깔, 무늬까지 챙기고 조명에 피부 톤까지 공을 들인 감독의 정성이 아름다운 허옥란을 완성했다. 역설적으로, 하지원은 세 아들의 엄마 허옥란을 연기한 덕에 여전히 로맨틱코미디의 주인공으로 손색없음을 과시했다.

영화 <허삼관>으로 수렴된 운명, 특별한 사연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운명의 또 다른 이름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열정과 노력으로 채운 과정이 가져온 개연성 있는 결과라는 얘기다. 만들어져야 할 영화가, 만들어야 할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그 깔끔하고도 아름다운 풍경, <허삼관>. 어지러운 세상에 볼 만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