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평규 칼럼] 중국을 넘어 대륙의 리더로 올라선 '시진핑'

2014-09-01 17:22
중국연달그룹 조평규 부회장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1953년 6월 중국공상당 중앙선전부 부장이자 정무원(政務院) 문교위원회 부주임인 시중쉰(習仲勳)과 그의 부인 치신(齊心)사이에서 태어났다. 시주석이 5살 때 시중쉰은 국무원(당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부총리 겸 비서장으로 승진했다.

시중쉰은 1913년 10월 산시성(陝西省) 부평현(富平縣)의 부농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13살 때 혁명에 참가했고, 15살 때 학생운동에 참가해 체포되어 감옥에서 중국공산당의 당원이 되었다. 그는 20대에 이미 중국공산당 시베이(西北)지구의 군대에서 부사령관 위치를 차지했다. 마오쩌둥이 2만5000리의 장정(長征)을 할 당시 홍군 제1방면군의 후방을 받쳐 줌으로써 홍군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국공내전(國共內戰)중에 시중쉰은 중국공산당 시베이국 서기, 시베이 야전군 부정치위원 등의 요직을 맡았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부를 수립할 당시 그는 중국공산당 시베이국 제2서기,시베이 군정위원회 주석대리, 제1야전국 및 시베이 군구 정치위원을 맡았다. 시베이 최고사령관 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가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그는 시베이 5개성의 당정군(黨,政,軍)의 권력을 장악한 시베이왕의 지위를 누렸다. 시중신은 중국공산당내에서 절약을 엄격하게 실천하고, 덕과 재능을 겸비한 것으로 유명했다. 

시진핑은 아버지의 정치적인 배경으로 북경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시중쉰은 자녀들에게는 엄격했다. 특히, 자녀들의 옷을 여러 번 기워서 입거나 형제자매들의 옷을 물려서 입는 근검 절약 하는 가풍을 지켰다. 혁명동지인 보이보(薄一波)의 아들 보시라이(薄熙來) 등이 사치한 생활에 비하면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시진핑은 고위간부자제들만 다니는 베이징 81학교에 다녔다.

시중쉰은 1962년 가을 류즈단(劉志丹)사건으로 부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류즈단 사건이란 서북산간지역에 근거지를 창건한 류즈단의 입지전적인 활동을 묘사한 장편소설이었는데, 소설의 출간에 동의하였다는 죄목으로 권력투쟁에 휘말려 실각하게 되었다. 시중쉰은 이후 16년간 심사,구금,감호를 당하였다.

1966년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발발했다. 마오쩌둥이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4인방을 이용,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한 사건이었다. 출신성분이 지주이거나 지식인 그리고 이념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수난을 당했다. 물론 등소평 같은 이념보다 실용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실각했다. 많은 간부들이 숙청되어 57간부학교 같은 시골에서 장기간 사상개조 교육을 받았다. 문화대혁명기간 10년 동안 학생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문혁 기간 동안, 마오쩌둥의 상산샤향(上山下鄉)운동으로 도시의 청년들이 3000만명이나 농촌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하층, 중층농민 교육을 받았다. 한마디로 천하대란이 일어난 것이다.

1969년 15살 시진핑도 산시성 옌촨현(延川縣)의 농촌에 내려가 하방 운동에 참여했다. 도시에서 귀공자로 자란 그에게 벼륙의 공격, 음식, 노동, 사상 개조의 고통은 그를 단련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시골농촌 생활에 적응하는데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중국공산당 가입신청을 10번이나 한 끝에 어렵게 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지부 서기를 맡았으며, 농촌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여, 기층으로부터 높은 신임을 얻었다.

시진핑은 7년간 산베이에서 생활한 후, 1975년 22살에 북경으로 올라와서 청화대 화학공정과에 입학하였다. 시진핑의 청화대학교 입학은 부친의 후광이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시진핑 자신도 시골에서 7년간 자기를 단련하면서 독학으로 꾸준히 공부를 계속하여 대학입학 후보로서 손색없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입학이 가능하였다. 시진핑은 “ 칼은 돌 위에서 갈고,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 단련된다”고 하며 “산베이 시간은 나를 성장 진보 시키는 소중한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1978년 65세의 시중쉰은 복권되어 정치협상회의의 상무위원이 되고, 광동성 제1서기를 맡아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끄는 최일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광동성에 4개 특구(深圳,珠海,汕頭,廈門) 설치를 건의한 장본인 이었다. 4개 특구의 성공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폭제가 되었다. 시중쉰은 지금의 중국경제의 기초를 놓은 사람으로 추앙 받는다. 2012년11월 시진핑 주석이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추대되고, 가장 먼저 방문한 곳도 부친이 개혁개방을 추진하여 성공을 거둔 선전(深圳)이었다. 등소평이 개혁개방 제도를 만들었다면,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실천한 사람이 시중쉰 선생이었다. 중국공산당 원로들은 시진핑이 공산당 총서기로 결정된 후, 혁명열사묘역을 참배하는 것보다 먼저 광동성 심천을 방문하여 부친의 업적을 둘러 보는 행동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어 놓았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 겸 국방부장 껑뱌오(耿彪) 의 비서로 현역 군인이 되었다. 시주석은 3년간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근무하는 동안 군무를 익힐 수 있었고, 군대 내 많은 사람들을 사귈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쩡칭홍(曾慶紅)과의 교류는 나중에 중앙상무위원으로 진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쩡칭홍의 부친 쩡산(曾山)은 신중국 탄생 이후 상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시주석의 부친 시중쉰 선생과 형제처럼 지낸 사이였다.

1982년 3월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장래가 보장된 막강한 권력자리를 사직하고, 하북성(河北省) 정딩현(正定縣)의 부서기로 지방정부의 공무원의 길을 선택했다. 시 주석은 당시 “중앙에서의 한가하고 편안한 생활이 오히려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군인의 앞길은 활동무대가 상당히 제한적이기에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선택은 시진핑의 장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하북성 정딩현에서 관광업을 발전시키기 룽궈푸(榮國府)라는 영화와 드라마 촬영기지를 건설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1985년6월 그는 복건성 샤먼으로 가서 부시장으로 부임하였다. 샤먼은 중국개혁개방 초기 4개 특구 중의 하나로 개혁개방을 시험하던 도시였다. 시 주석은 1990년 5월 푸저우(福州)시 서기를 거쳐 복건성 성장 등을 담임하면서 2002년 절강성 성장으로 전근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17년을 보냈다. 복건성은 자칭린(賈慶林),허궈창(賀國強) 등 중국 중앙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시진핑이 다른 지도자들과 다른 점은 항상 지방관을 담임하면서도 군인의 신분을 유지하였다는 점이다. 규모가 크든 적든 자기가 관할하는 도시의 군부대의 정치위원으로 참여하여 군대와의 교감을 가졌다. 권력서열로 따지면 자기의 위치보다 몇 단계 아래지만, 그들과 어울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로부터 획득된 것이다(權力是從槍杆子裏獲得的)”고 했듯이 중국에서 군대의 역할은 막강하다. 시진핑 주석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국가주석의 위치에 오르는데 보이지 않는 군대내의 지지가 있었을 것임은 말할 필요 조차 없다.

아버지 시중쉰의 청렴하고 검소한 가풍과 인맥 유산, 청소년기의 산서성 농촌에서의 7년간 단련, 청화대학교 학력,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와 군인 신분의 유지, 복건성에서의 17년간의 목민관으로서의 경험과 성과, 그의 겸손하고 노인과 선배를 공경하는 심성, 일을 대하는 성실한 자세는 오늘의 그를 있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pkcho1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