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융캉, 수습사원에서 황제로, 그리고 멸문지화까지
2014-07-30 14:20
저우융캉 영욕의 세월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수습사원에서 '황제'까지, 그리고 멸문지화. 저우융캉(周永康) 전 상무위원의 기구한 인생이다.
1942년 장수(江蘇)성 우시(無錫)에서 태어난 저우융캉은 베이징석유학원(현 중국석유대학)을 다닌 후 다칭(大庆)유전에서 수습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때가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던 1966년이다. 1970년에 랴오허석유탐사국으로 자리를 옮겨 승승장구했다. 1983년에 랴오허석유탐사국 국장 겸 판진(盘锦)시 시장에 올랐다. 판진은 소문난 유전도시다.
저우융캉은 1985년 중앙 국무원 석유공업부 부부장(차관)으로 발탁돼 중앙무대에 올랐으며, 1996년에는 장관급인 중국석유천연가스총공사(페트로차이나) 사장에 취임했다. 이어 1998년 석유 및 자원을 관장하는 국무원 국토자원부 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중국의 석유업계를 좌지우지하며 '석유차르'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이력에 암운이 드리운 건 다름 아닌 보시라이 사건에서 시작됐다. 보시라이는 2012년 자신의 심복이었던 왕리쥔(王立軍)이 청두 미국 영사관에 잠입해 망명을 요청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저우융캉은 보시라이를 비호하며 그의 낙마를 막기 위해 시진핑 당시 부주석과 대립각을 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명분에서 밀렸으며 '부패 척결'을 내세운 시진핑 지도부의 권력 장악이 본격화하면서 그의 정치력은 급속히 약화됐다. 측근들은 거의 모두 조사를 받고 낙마했으며, 결국 저우융캉 본인 역시 수의를 입게 될 신세로 전락했다. 한때 막강 권력의 주인공 저우융캉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최초로 사법처리되는 상무위원이라는 불명예의 주인공으로 기록될 처지에 놓였다.
저우융캉의 측근들 역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최근 저우융캉의 세력으로 분류되는 석유방과 쓰촨방, 공안방, 비서세력이 무더기로 낙마하면서 저우의 처벌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왔다. 지난해 낙마한 장제민 전 국유자산 감독관리위원회 주임과 왕융춘 전 중국석유 부총경리 등은 석유방으로 분류된다. 리춘청 전 쓰촨성 당 부서기와 류한 진루그룹 이사장 등은 쓰촨방이며, 궈융샹 쓰촨성 부성장과 리화린 중국석유 부총재 등은 저우의 비서를 지낸 인사들이다. 공안 분야에선 지난 연말 낙마한 리둥성 공안부 부부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