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는 동반자” 장경호 동국제강 회장 의지, 평화적 노사관계 구축(상)
2014-05-28 16:13
동국제강 20년 평화적 노사관계 발자취
1994년 2월 14일 동국제강 부산제강소에서 열린 ‘항구적 무파업’을 골자로 한 ‘노사협력선언문채택 결의대회’를 앞두고 장상태 당시 동국제강 회장(2000년 별세)은 회사 임직원들에게 그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2014년 5월 28일 동국제강은 한국 노사관계에 있어 또 다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20년 연속 임금 및 단체협상 무분규 달성과 더불어 올해 춘투의 핵심 이슈였던 통상임금 이슈를 전 산업을 통털어 대규모 사업장 최초로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통상임금 합의는 평행선으로만 치닫고 있던 타사 노사에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렇듯 동국제강은 철강업계, 더 나아가 제조업, 더 크게 보면 우리나라 산업 전반에 걸쳐 가장 평화로운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대표 기업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항구적 무파업, 무분규 등과 같은 진정한 화합과 실천이 실현되기까지 동국제강 노사 관계는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80년 4월, 동국제강의 주력 공장인 부산 공장에서 방화와 폭력이 난무한 전면 파업이 발생했다. 1954년 설립된 동국제강의 첫 직원들이 벌인 물리적 충돌이었다. 5일간 계속된 공장 가동 중단은 물론 설비 손실까지 발생했다. 모든 회사의 구성원은 가족과 같다고 여겼던 직원들이 욕설과 비난을 퍼부어대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본 장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동국제강에게는 뼈아픈 상처를 안겨준 일이었던 그 때, 현장을 지켜보던 장 회장은 피땀으로 일군 공장의 파업 현장을 바라보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87년 9월 동국제강 노동조합이 설립됐고, 동국제강의 노사 관계 역사는 이때부터 새롭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그 해는 6.29선언이 있은 후 노조결성과 노사분규가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상승과 국제경쟁력 상실, 정치적 불안이 중복돼 위기감이 팽배해있었다. 이에 동국제강 노사는 회사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사가 협력할 것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노사공동선업문’을 발표했다.
장 회장은 “관리자는 노조를 경영의 동반자라는 인식으로 잘 이끌어 주어야 하며 노조 역시 회사의 발전을 위해 할 일이 많다고 본다. 어찌보면 노조의 압력에 의해서 회사의 발전을 도모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노사는 동등관계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1년 7월, 동국제강에서 또 한 번 10일간의 준법 파업이 발생하며 고비를 맞이했다. 이는 동국제강 역사에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 파업이었다.
당시의 파업이 강성 노조의 투쟁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던 회사로서는 이에 맞선 대립보다는 어떻게 하면 조합원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에 더욱 주력했다.
특히, 장 회장은 노조에 대한 비난 보다는 관리자들에게 “노사문제와 관리에 있어서 간부들의 지식이 너무 모자라며, 노조를 보는 시각도 부족하다”고 질책하고, “노사간이라 함은 결국 인간관계일 것이다. 또한 어느 단체이든 단체의 기본은 ‘공동의 목표, 공동의 이해관계’가 같아야 한다. 우리 동국도 공동의 이해관계가 무엇인가를 숙지하고 노사간 힘을 모아 공동의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회장의 의지에 따라 파업을 통해서는 회사는 물론 구성원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하며 노조와 신뢰를 쌓아 나갔다.
10일간 이어졌던 이 파업으로 생산 차질을 빚었지만, 동국제강의 노사관계는 오히려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파업이 끝나고 노사는 공동 선언문을 채택하고 협력을 근간으로 하는 신노사 문화를 정착시키자고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를 통해 회사는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지속적인 대화를 나눌 때 제대로 된 신뢰가 형성된다는 것을 체험했고, 노조 역시 파업과 같은 극한 대립이 결코 실익이 없다는 점을 공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