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중국역사>17일 중국 베트남 침공, 19일 덩 사망

2014-02-16 17:56

아주경제 한오종 기자 =

▲ 2월17일(월) - 1979년, 중국 베트남 침공

중국은 1979년2월17일부터 3월16일 까지 베트남 침공을 감행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베트남이 중국의 영토를 끊임없이 침공해 이를 사수하고 징벌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1965년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할 때 중국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우방으로서 “베트남을 침공하는 것은 바로 중국을 침공하는 것이다”고 발표했으나 14년 뒤에는 오히려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한 것이었다.

이 전쟁은 캄보디아를 놓고 벌인 세력 다툼이었다. 1975년 무력통일을 이룩한 베트남은 과거 프랑스령 식민지에 포함됐던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자신의 세력권에 포함시키려 했다.

그러나 중국은 베트남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캄보디아 정권을 지원했고 지원을 받은 공산세력인 크메르루즈는 베트남 바로 앞에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베트남은 1978년 캄보디아(당시 국명: 크메르)의 친베트남 사령관을 앞세워 크메르루즈를 밀림 지대로 내쫓고 다시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했다. 이것이 중국이 무력 침공을 하게 된 배경이었다.

중국측 발표에 따르면 20여일간의 전쟁동안 베트남군 37,300여명을 사살하고, 2,2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했으나 중공군의 피해는 이보다 훨씬 컸고 사실상 패퇴였다고 한다.

전쟁발발과 함께 단교했던 중국과 베트남은 국경문제 등으로 인해 냉량한 관계를 지속해오다가 1991년 복교했다. 이를 계기로 양국 정상이 상호방문을 하는 등 정상화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장쩌민(江澤民)은 1994년과 2002년에 총서기 겸 국가주석 자격으로 , 리펑(李鵬)은 1996년 에는 총리 신분으로, 2001년 9월에는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격으로 각각 베트남을 방문했다.

▲2월19일(수) - 1997년, 덩샤오핑 사망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이 향년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04년 8월 22일 생으로 향년 93세였다.

덩샤오핑 사후 그에게 중국 공산당이 붙인 수식어는 다음과 같다.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 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 중국 사회주의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의 총설계사, 덩샤오핑 이론의 창립자.”

그는 1904년 8월 22일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에서 태어났다. 1920년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22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24년에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1926년에는 소련에서 유학을 했다.

1927년 중국으로 돌아온 이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여러 중임을 거치고 1954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장(秘書長), 조직부 부장,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 등을 맡는다. 이후 발전을 거듭하다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 일체의 직위를 상실하게 된다.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와 함께 경제발전을 위해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다가 홍위병으로부터 '반모(反毛) 주자파(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했던 것이다.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돼 국무원 부총리 직위를 회복하고 1975년 중국중앙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역임한다. 그러다 소위 사인방(四人幇)으로부터 1976년 다시 한번 축출된다.

이후 1976년10월 사인방이 깨지고,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자 77년7월 다시 일체의 직무를 회복한다. 1978년12월 중국공산당 제11차 삼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을 천명하고 실질적인 최고지도자로서 중국의 새로운 길을 이끌게 된다.

덩샤오핑 사망당시 중국 국가 지도자들이 그의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1997년 2월 타계할 당시 그가 천안문 유혈진압의 최종 결정권자였음에도 중국의 인민들은 마치 아버지를 잃은 듯이 슬퍼했다.

▲ 2월21일(금) -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중국방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시작했다. 27일까지 계속된 방문동안 세계의 모든 시선은 ‘죽(竹)의 장막’ 너머로 향했다.

이날 밤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닉슨과 만난 마오쩌둥(毛澤東)은 “미국 방면으로부터의 침략, 혹은 중국 방면으로부터의 침략, 이런 문제는 비교적 작은 문제로 큰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이유는 현재 우리 사이에는 상대방에 타격을 가하려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닉슨은 “ 미국과 중국은 서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온 것은 새로운 정세가 모습을 드러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화를 실현할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마오와 닉슨의 이 같은 말의 교환은 그들의 이력을 배경에 놓고 볼 때 지극히 극적이다. 마오는 미국이 신생 공산 중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에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전에 개입한 인물이었고 닉슨은 매카시즘 관련 의혹을 받을 정도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방문 마지막 날인 1972년 2월 27일 상하이(上海)에서 발표된 ‘중미(中美)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양국은 사회제도가 어떠하든 간에 각국의 주권과 영토의 완정(完整)을 존중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상호평등의 입장에서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며 평화공존의 원칙 아래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를 처리한다는 데 동의했다”라고 밝혔다.

▲ 2월23일(일) - 1988년, 중국 영화 ‘붉은 수수밭’ 베를린 영화제 대상 수상

붉은 수수밭 영화 속 나병환자에게 시집을 가고 있는 주인공 궁리


장이모우(張藝謀)가 감독하고 궁리(鞏俐)가 주연한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粱, 훙까오량)’이 베를린 영화제에서 대상인 금곰상을 수상했다.

유럽의 3대 영화제 중의 하나인 베를린 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가 대상을 수상하기는 처음이었다.

시안영화제작소(西安電影制片廠)가 제작한 이 영화는 2월 15일 처음 상영될 때부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월 12일부터 23일까지 서베를린에서 계속된 영화제에서 ‘붉은 수수밭’은 가장 많은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이자 가장 화제를 불러 온 영화였다.

2012년에는 동 영화의 원작소설 작가 모옌(莫言)이 노벨문학상을 받아 다시 한번 조명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