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중국역사> 라오서 출생, 전취덕 출현

2014-02-02 17:04

아주경제 한오종 기자 =
▲ 2월3일(월) - 1899년, 중국 근대문학의 대표작가 라오서 출생
‘낙타상자(駱駝祥子)’의 작가 라오서(老舍)가 베이징(北京)에서 태어났다.

중국 근대문학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인 라오스는 ‘해서파관(海瑞罷官)’을 쓴 우한(吳唅)과 함께 문화대혁명 때에 희생당한 지식인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1966년, 향년 67세의 나이로 홍위병의 모욕을 받은 뒤 호수에 투신자살했다.

라오서는 필명이며 본명은 수칭춘(舒慶春)이다. 1918년 라오서는 베이징 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베이징 제17소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1924년에는 영국 런던대학의 중문강사로 초빙, 이때부터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장편 소설 ‘라오장의 철학(老張的哲學)’이 이 시기 쓰여진 첫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26년 7월부터 문학잡지 ‘소설월보(小說月報)’에 연재되면서 문단을 진동시켰다. 6년 동안 영국에 체재하면서 라오서는 이밖에도 ‘조자왈(趙子曰)’, ‘이마(二馬)’ 등 지식인의 생활 모습을 씁쓰레한 유머로 그린 장편을 잇달아 발표했다.

라오서는 이러한 작품 활동을 통해 유머작가이자 중국 신문학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며 문단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다졌다.

1930년 귀국한 라오서는 치루대학(齊魯大學), 산둥대학(山東大學)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묘성기(猫城記)’, ‘이혼’, ‘낙타상자’ 등의 장편소설, ‘초승달(月牙兒)’, ‘나의 일생(我這一輩子)’ 등 중편소설과 ‘미신(微神)’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특히 ‘낙타상자’는 비판적 리얼리즘 방향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진 결정적 계기는 1945년 톈진(天津) 미국 영사관의 미국인 직원이 그의 대표작 ‘낙타상자’를 번역, 미국에서 출간하면서였다. 번역서는 이후 ‘이달의 책클럽’ 선정 도서가 되었으며 미국 외에 일본, 유럽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라오서는 1978년 6월 복권 후 루신(魯迅), 2003년 100세의 생일을 맞았던 바진(巴金) 등과 함께 중국의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4대 작가 중 한사람으로 공인되었다.

▲ 2월6일(목) - 1956년, 푸퉁화 확대 실시

1956년 2월 6일 중국 국무원은 ‘푸퉁화(普通話) 확대에 관한 지시’를 발표하고 전국적으로 푸퉁화를 널리 사용하도록 했다.

푸퉁화는 베이징어를 표준음으로써 북방화(北方話)를 기초로 한 방언으로 현대 백화문(白話文) 저작을 전범으로 삼아 어법의 규범을 규정한 현대 한민족(漢民族)의 공용어다.

중국은 민족 공동어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을 경우 경제성장에도 지장을 줄 것이라는 인식 아래 9월 3 번째 주를 ‘푸퉁화 강조주간’으로 정하는 등 푸퉁화 보급에 주력하고 있다.

2005년 5월 중국국가어언(語言)위원회가 교육부와 공동으로 전국 31개 성·시·자치구 주민 중 47만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푸퉁화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구는 중국 전체 인구의 53%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중 ‘태어나면서부터 푸퉁화를 사용한 사람들’은 8%에 불과했다.

한편 가정에서 푸퉁화를 사용하는 비율은 18%에 그쳤으며 학교에서도 절반에 못 미치는 42%만이 푸통화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푸퉁화는 북방방언의 어휘를 사용하고 있고 베이징 발음을 위주로 한다. 문법도 여기에 따르도록 규정되고 있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한민족의 발전에 따라 본래의 황허강(黃河江) 유역으로부터 그 주변 지역으로, 특히 남방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때에 방언의 차이가 분명해졌다.

현대 중국어에 있는 무수한 방언은 발음과 어휘상의 특징에 따라 크게 5군(五群)으로 나뉜다.

1. 북방방언(官話方言)
대부분 양쯔강(揚子江) 이북 지역에서 사용한다. 양쯔강 이남에서는 난징(南京) 주변, 구이저우(貴州)성, 윈난(雲南)성 등에서 쓰인다. 중국 국내의 한민족 인구 가운데 약 70%가 사용한다.

2. 오방언(吳方言)
양쯔강 이남의 장쑤(江蘇)성과 저장(浙江)성에서 쓰인다. 상하이어(上海語)와 쑤저우어(蘇州語)가 여기에 속한다.

3. 민방언(閩方言)
푸젠어(福建語) 푸저우(福州)를 중심으로 하는 민북방언과 샤먼(厦門)을 중심으로 하는 민남방언으로 나뉜다. 민남방언은 광둥(廣東)성 동부 차오저우(潮州)·산터우*汕頭) 등과 대만 그리고 하이난(海南)성에서도 사용한다.

4. 월방언(粵方言 : 웨방언)
광둥어(廣東語)라고 한다. 광둥성·광시좡족(廣西壯族) 자치구·홍콩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가리키며 해외화교는 대부분 웨방언과 민방언을 일상어로 한다.

5. 객가방언(客家方言)
전란과 기근으로 피난온 북방 난민의 자손이라는 객가 사람들의 방언이다. 광둥·푸젠·장시(江西)성 등의 경계지대를 중심으로 화난(華南) 각지에 산재한다.

▲ 2월9일(일) - 1980년, ‘카오야’의 대표 식당, 전취덕 출현

중국 공산화 이후 문을 닫았던 베이징(北京) 오리요리(베이징 카오야) 전문식당 ‘전취덕(全聚德 : 취안쥐더)이 옥호를 회복하고 영업을 재개했다.

전취덕의 카오야는 베이징을 대표하는 요리로 공산화 이전 서양인들이 베이징을 상징하는 3D(Duck, Dust, Diplomacy)의 하나로 꼽을 정도였다 .

전취덕은 1864년 양전인(楊全仁)이라는 사람에 의해 베이징 첸먼(前門)에서 처음 등장했다.

‘전취덕’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데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양전인이 오리요리점을 내기위해 산시(山西)성 사람이 운영하던 말린 과일 가게를 인수하였는데 그 가게의 이름이 ‘덕취전(德聚全)’이었다. 양전인은 새로운 가게명을 정하기 위해 풍수선생을 찾아갔다.

풍수선생은 “상점의 터는 장사가 잘될 길지이나 상점이름이 이를 막고 있으니 그 이름을 뒤집어쓰면 아주 장사가 잘될 것”이라면서 “또한 ‘전취덕’이란 글자 뜻은 상점 주인의 이름 전인(全仁)과는 짝을 이루므로 전취덕을 상호로 하면 하늘이 도울 것”이라고 점쳤다. 그리고 이후 풍수선생이 예고한대로 상점은 날로 번창해나갔다고 한다.

전취덕은 현재 베이징 시에서 첸먼 본점 외에 왕푸징(王府井), 허핑먼(和平門) 등에 분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네이멍구(內蒙古)의 바오터우(包頭)를 비롯, 난창(南昌). 쿤밍(昆明), 구이린(桂林) 등지에도 지점을 냈다. 일본, 태국, 쿠웨이트 등에도 전문 요리사를 파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