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국산화 30년...비리로 얼룩진 그들만의 리그(종합)
2013-06-09 18:33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원전 마피아’ 양성 신호탄<br/>-설계에서 시험평가까지 한전기술 한수원 출신 일색...예고된 원전비리<br/>-특정 학맥 중심으로 ‘검은 카르텔’ 형성...한수원 퇴직자 30% 관련 업체 재취업
아주경제 신희강 기자= 최근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원전 비리 파문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위조된 부품을 사용한 원전의 가동이 중단되면서 전력수급마저 불안하기 때문이다.
특히 원전과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는 공기업, 민간기업, 관료 출신이 인증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등 그들만의 ‘검은 카르텔’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원전이 국산화되는 30년 동안 이들은 정보와 규제를 독점해 기득권을 유지하는 ‘원전 마피아’로서 검은 부패 고리를 광범위하게 형성한 것이다.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원전 마피아’ 양성 신호탄
한국은 지난 1978년 1호 원자력발전소 건설 이후 2013년 현재 23기의 원전을 운영 중이다. 국내 원전 건설사를 들여다보면 크게 외국기술 의존기(1971~1977), 기술축적기(1978~1986), 기술자립기(1987~현재)로 들 수 있다.
따라서 외국 주계약자가 발전소 착공부터 준공까지 모든 책임을 지고 사업관리 설계 자재구매 시공 및 시운전을 수행하는 일괄 발주(Turn-Key)방식으로 건설됐다.
하지만 1979년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로 미국이 신규원전건설을 전면 중단하면서 미국 부품업체들이 문을 닫았고, 국내 원전에 사용될 부품의 국산화가 진행됐다.
이에 고리 3·4호기,영광 1·2호기,울진 1·2호기 등의 원전 사업 추진 방식은 일괄발주 방식에서 분할발주(Non-Turnkey)방식으로 변경해 건설기술 자립에 박차를 가했다.
분할발주방식이란 한전이 사업관리를 주도하고 △종합설계용역 △원자로설비 공급 △터빈·발전기 공급 △원전연료 공급 및 시공 등을 분야별로 전문업체에 분할해 계약하는 형태를 말한다.
특히 효율적인 사업관리, 품질보증, 국산화율 제고를 위해 국산화가 불가능한 부문을 제외한 모든 기자재를 국내 제조업체에 발주시켰으며, 시공도 국내 전문건설업체에 맡기는 등 국내 업체의 참여폭을 확대했다.
원전 1기에 들어가는 부품만 300만개인 이 노다지시장에 국내 부품 업체는 쾌재를 부르며 너도나도 뛰어들면서, 부실부품마저 눈감아주는 본격적인 원전 마피아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기에 관리책임자인 한국수력원자력과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무능도 한 몫 더하면서 이들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설계에서 시험평가까지 한전기술 출신 일색...예고된 원전비리
원전 설계부터 시험평가까지 특정 출신들간 담합으로 똘똘 뭉친 원전 마피아들의 썩은 물은 '원전 비리'라는 총체적 인재(人災)의 결과물을 낳게 됐다.
원전 운영사인 한국수력원자력과 원전 설계와 부품 감리 업체인 한국전력기술 출신자들이 관련 업체나 단체를 입맛대로 주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78년 한전이 인수한 한전기술은 한전이 최대 주주로서 지분 74.86%를 가진 자회사다. 한전기술은 원자력·화력 등 발전소의 설계·감리를 전문으로 하는 엔지니어링업체로서, 국내 원자력발전소 설계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이들은 원전 설계를 비롯해 대부분의 원전 부품과 설비의 시험성적서 승인도 맡고 있으며, 이번에 위조된 원전 제어케이블의 시험성적서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
새한티이피는 이러한 한전기술 출신이 지분의 절반에 가까운 47%를 보유 중이다. 이 회사는 한전기술 출신인 대표이사가 1996년 한전기술 품질보증처 부장을 끝으로 퇴사한 이후 1999년 설립했다.
인력과 장비 부족에 시달리던 새한티이피였지만 불량 부품을 만든 JS전선이 새한티이피에 검증을 맡긴 이유는 한전기술 출신들이 새한티이피의 대주주나 이사로 등재돼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전기술이라는 든든한 甲을 배경에 둔 새한티이피는 지난 10년간 2백건의 검증 프로젝트를 도맡으며 민간 업계 1위로 부상했다.
원전 부품 검증업체를 인증하는 대한전기협회도 이들과 단단한 유착관계를 형성했다. 현재 전기협회장은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이며, 부회장 5명 가운데는 6일 면직된 김균섭 한수원 사장도 포함돼 있다. 5명의 비상근 부회장과 이사 28명 가운데는 안승규 한전기술 사장 등 대부분 원전과 관료 출신으로 구성돼 있다.
전기협회 내 원전부품 인증을 직접 책임지는 기술품질전문 위원 9명도 한전과 한수원 출신으로 대거 포진해 있는 등 원전 부품을 승인하는 기관 출신들이 부품 검증회사와도 한 솥밥을 먹고 있던 것이다.
실제 원전 부품의 납품·검증 과정은 부품 검증업체에 대한 자격 인증(대한전기협회)ㅡ>원전 설계·발주(한전기술)→제어케이블 제작(JS전선 등 민간업체)ㅡ>부품 성능시험 검증(새한티이피 등 한전기술 출신의 민간 검증업체)ㅡ>최종 점검 승인(한수원)으로 이어진다.
즉 부품 제작부터 검사, 감독, 가격결정 등 전 과정에서 정부와 한수원, 한전기술 간 비리사슬이 끈끈히 형성된 셈이다.
원전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에 부품 검증 서류를 위조한 새한티이피를 인증해 주는 과정을 보면 발주처와 납품업체가 성능검증업체를 인증한 꼴”이라며 “사실상 이번 원전비리는 일치감치 예고돼 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정 학맥 중심으로 ‘검은 카르텔’ 형성...한수원 퇴직자 30% 관련 업체 재취업
우리나라는 지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안위가 설립되면서 원전의 ‘규제’와 ‘운영’ 기관이 나뉘는 선진국형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원전 운영과 감시를 맡은 곳은 대부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출신들로 채워져 있어 회전문식 인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현재 국내 대학 가운데 원자력 관련 전공을 개설한 곳은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양대 등 9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원자력학회장을 맡은 10명 중 강창순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은철 원안위 위원장 등 모두 8명이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나왔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해 새 정부 원자력 정책의 밑그림을 그린 장순흥 카이스트 교수와 원전안전 감시자 역할을 하는 이은철 원자력안전위원장도 이 곳 출신이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한국 원전 정책이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졸업자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셈이다.
한수원 퇴직자들이 원전 업계로 옮겨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국내 원전 관련 업체 가운데 한수원 퇴직자를 영입한 13곳이 지난 2010년부터 2012년 8월까지 한수원과 맺은 계약 금액은 총 1조6785억원에 이른다.
이처럼 강한 결속력으로 묶여 있는 한수원과 납품업체 사이란 점을 고려했을때 이번 위조 부품 검증과정에서도 이들의 인맥이 작용했을 거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 최근 10년간 원전 사업자인 한수원 퇴직자 중 30%가 원전 관련업체에 재취업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이익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산업계·학계·정부의 폐쇄적인 네트워크를 타파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한수원 임원 출신이 업체 대표나 협회로 이동해 그들만의 모임을 만드는 등 유착관계가 오랜시간 형성됐다”며 “특정 출신들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이익 사슬로 형성된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고 질타했다.
서 교수는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들은 원전을 감독하고 규제하는 독립 기구를 따로 두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외부 감시기구를 도입해 한수원의 독과점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