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기행 38 허난성편> 6-2. 제갈량의 초려10년, 어디였나

2012-02-13 18:12

(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제갈량(諸葛亮)은 181년 산둥(山東)성 낭야(琅邪)에서 제갈규(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세때 양친을 여의고 백부 아래 살다가 19세에 형주(荊州)로 와 스스로 농사를 짓고 학업을 쌓았다. 초야에 묻혀있기를 10년,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고 세상에 나선다.

제갈량이 10년동안 학업을 쌓은 초려가 어디인지에 대해 두가지 설이 있다. 중국 후베이(湖北)성 샹판(襄樊)시와 허난(河南)성 난양(南陽)시가 그 곳이다. 이 두 곳은 각자 자신의 지역이 진짜 초려가 있던 곳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난양시는 제갈량의 출사표에 나오는 ‘신본포의, 공경남양(臣本布衣, 躬耕南陽. 신은 본래 평민으로 남양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라는 문구를 내세우고 있다. 제갈량이 직접 난양에서 기거했다고 출사표에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비(岳飛)의 출사표 석비가 난양에 있으며, 유우석(劉禹錫)의 시에도 제갈량이 난양에 있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난양시는 이 같은 근거로 삼고초려의 장소가 난양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샹판시는 ‘고융중(古隆中)’이라는 이름으로 초려를 표현하고 있다. 삼국지에는 유비가 융중에 머물던 제갈량을 얻기 위해 몸소 제갈량의 초가집을 방문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융중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나와 있고 그 묘사가 지금의 융중 지형과 맞아떨어진다. 융중은 후베이성 샹판시의 한 지명으로 남아 있다. 삼국지에 융중이라는 지명이 적시된 만큼 삼고초려는 샹판시에서 이뤄졌다는 것.

하지만 과거의 지명과 현재의 지명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과거의 난양이 현재의 난양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불수도 없고 과거의 융중이 현재의 융중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여러 정황을 살펴볼때 초려의 정확한 장소에 대해 칼로 무를 베듯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