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15>두칭린-후진타오 장쩌민 두루두루 신뢰 얻어

2011-05-22 10:40


(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두칭린(杜靑林) 중국공산당 중앙 통일전선부 부장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쩡칭훙(曾慶紅) 전 부주석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두칭린은 중국 정치계 최대계파인 공청단파와 상하이방으로부터 거부감이 없고, 두루두루 신임을 얻고 있다는 것이 그동안 검증받은 업무능력과 함께 가장 큰 강점이다.

우선 그는 공청단파로 분류될 수 있다. 두칭린은 지린(吉林)성 출신으로 1979년부터 1984년 사이 지린성 공청단 부서기와 서기를 역임했다. 지린성 공청단 서기로 있을 때 공청단 중앙의 중앙위원을 겸임했는데 당시 공청단 제1서기가 후진타오였다.

리커창(李克强), 리위안차오(李源朝), 뤄즈쥔(羅志軍) 등과 달리 지방 공청단에서 일했을 뿐 두칭린은 공청단 중앙에서 일을 한적은 없다. 때문에 그는 공청단파이기는 하지만 공청단 색채가 옅은 편이다.

두칭린이 2006년12월 장쉐중(張學忠)을 대신해 쓰촨(四川)성 서기를 맡았을 때도 후 주석의 신임을 얻었다. 두칭린은 이후 2007년 쓰촨성 서기직을 공청단파의 좌장인 류치바오(柳奇葆)에게 넘겨주기까지의 과도기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공청단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았다.

또한 두칭린은 장쩌민 총서기 시절 그의 두터운 신임아래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지린성에서 일하던 두칭린은 1992년 하이난(海南)성 위원회 부서기로 전임했고, 장쩌민에 의해 성 서기까지 승진했다. 게다가 과거 장쩌민이 기계공업부장을 할 때 산하기관에서 일했던 인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두칭린이 상하이방인 것도 아니고 장쩌민 전 주석의 최측근 인사도 아니다.

때문에 내년 있을 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의 정치국위원 인사에서 후 주석과 장 전 주석간의 권력싸움이 팽팽해져 일부 자리가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는 이력을 지닌 두칭린은 양측의 합의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훌륭한 카드라는 평가다. 또한 두칭린은 내년이면 66세로 이번 18차 전국대표대회가 그가 중앙위원에서 정치국위원으로 올라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도 배려차원의 점수를 얻을 수 있다.

◆버스타고 귀경했던 공청단 서기

두칭린은 지린성 판스(盤石)출신으로 지린시 공산당 위원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창춘(長春) 디이자동차공장에서 10년여 동안 근무했다. 이 곳에서의 최종 직함은 부공장장이었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 역시 디이자동차 공장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유대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두칭린이 디이자동차에서 근무하던 시절 장쩌민 총서기는 상위 중앙정부 부처인 제1기계공업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두칭린은 지린성 공청단 부서기와 서기를 역임했다. 두칭린은 그가 지린성 공청단 서기로 있을 때 부서기였던 이덕수(李德洙, 조선족) 전 국무원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두쉐팡(杜學芳) 전 창춘시 서기와 더불어 지린성 공청단 3인방으로 불렸다. 이들 세 사람은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가 1980년대 초반 미래 지방 지도자로 육성한 인물들이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두칭린은 공청단의 지린 성위원회 부 서기, 서기, 공청단 중앙위원회 위원을 맡는다. 당시 지린 공청단에는 베이징자동차의 지프 1대와 톈진(天津)에서 만들어진 1대의 승합차가 있었다. 두칭린은 하지만 이들 차를 사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을 했다. 게다가 두칭린이 춘제때 고향 판스에 돌아갈 때도 승합차를 이용하지 않고 가족들 모두가 장거리버스를 이용했을 정도로 청렴했다고 전해진다. 



◆일추삼고(一推三考) 인사제도

그는 이후 장춘시 부서기, 지린성 조직부장, 지린성 부서기를 거쳤다. 두칭린이 지린성 조직부장이던 시절 그는 ‘일추삼고(一推三考)’라는 인사방식을 도입했다. 간부가 추천한 사람을 대상으로 세가지의 시험을 봐 공직자를 선발하는 방식이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한 인사는 “두칭린은 사고가 개방적이고, 창의력이 풍부했다”고 평했다.

또한 농촌의 하부 조직 건설 분야에서도 공을 세웠다. 두칭린은 농촌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물류망이 개선되야 하며, 도로가 개선되면 운송비가 절감돼 농가의 소득증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했다. 두칭린은 당원 1인당 농민 1개 집단을 전담시켰다. 이를 통해 농촌 구석구석까지 당원이 책임지고 도로를 깔도록 했다. 또한 선진적인 경작기술을 전수하게끔 했고, 시장경제에 신속하게 적응하도록 교육활동을 벌이도록 했다. 이 같은 방법은 중공 중앙으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타지의 공무원들이 자주 들러 지린성을 배워갔다.

두칭린은 1992년 하이난(海南)성 부서기로 부임해 갔다. 이후 1998년에는 하이난성 서기로 승진했다. 그는 하이난성에서 농촌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91년 러둥리(樂東黎)족 자치현의 복보향(福報鄕)촌의 한 촌민이 하이난성 성정부에 쓴 편지가 두칭린의 손에 까지 들어갔다. 그 마을은 49개 집에 266명이 사는 조그만 곳이었으며 1인당 GDP가 다만 4500위안에 불과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도랑물로 생활용수를 삼고 있었다. 2001년6월 두칭린은 낡은 지프를 타고 산간지역에 위치한 이 마을을 찾았다. 촌민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집과 들에서 생활상을 확인했다.

촌내에 새로운 길을 내게했고, 촌민이 전보를 사용하게끔 했으며 생활용수 분야도 개선했다. 동시에 그 마을에 망고를 비롯한 과일을 재배하게끔 했다. 두칭린은 스스로 50그루의 망고나무와 3000그루의 야자수를 공급해 함께 마을에 심었다.

그해 8월 그는 하이난성 우즈산(五指山) 시의 슈만상(水滿上)촌을 들러 주민인 왕구이민(王貴民)의 집에 하루밤을 묵었다. 나무 널침대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고구마죽으로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그의 집을 떠날 때 두칭린은 200위안을 식비조로 내놓았다. 이 같은 활동은 성민들에게 목민관으로서 청렴하고 따뜻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계단으로 출근하는 장관

두칭린은 지방에서의 농정경험을 인정받아 2001년8월 농업부장으로 임명됐다. 농민 문제는 당시 이미 주룽지(朱鎔基)총리마저 어려움을 느끼던 사안이었다. 농업은 중국의 WTO가입 후에 최대 도전에 직면한 업종이라고 여겨졌다. 어떻게 해야 농민이 수입을 늘이도록 하며, 어떻게 해야 농산물 경쟁력을 향상시킬지가 전국적인 관심거리였다.

농업 장관을 맡는 후, 두칭린은 동북, 서북, 서남, 동남, 연해지역을 몇 개월동안 조사했다. 조사 연구의 목적은 농민의 수입 증가와 농산물의 품질향상이었다.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농촌부 쉬샤오칭(徐小靑)부부장은 당시 “당시 두칭린과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데 그가 매우 심도있게 조사를 했고, 농업문제에 대해 통달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6개월의 조사를 벌인 끝에 3대조치를 선포했다. 우선 우수 밀 재배지역, 고급 대두유 생산지역 등 우수 농산품 생산구역을 선포했고, 두번째로 농민의 생산조건, 생활조건 개선, 축산농가에 고품질 젖소 배아 이식 프로그램 등의 조치를 실시했으며, 세번째로 2003년을 과학영농의 해로 선정. 25만 청년 농업인을 육성시키는 대책을 마련했다. 이 같은 조치로 그는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농업부장 시절의 청렴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당시 농업부 건물에서는 1000여명이 몇 개의 엘리베이터를 공용했으며, 출퇴근 시간이나 외부에서 손님이라도 올 때면 엘리베이터가 무척 붐볐다. 두칭린은 높은 층의 사무실을 사용했지만 항상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부장의 솔선수범하에 그의 부하직원들도 모두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4년 조류독감이 전 중국을 휩쓸었다. 두칭린은 민심안정을 위해 스스로 농업부 직원식당을 찾아 직원들과 함께 닭고기를 먹었다. 이 영상은 중국전역에 대대적으로 보도됐으며 인민들의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티베트문제 단호한 입장 견지

2006년 12월 중공 쓰촨(四川)성 위원회 서기를 맡았고, 쓰촨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으로 2007년 1월 당선됐으며, 같은 해의 5월에 쓰촨성 서기를 연임했다. 이후 2007년 12월 중국공산당 정치국위원에 올라선 류옌둥(劉延東)의 후임으로 중국 공산당 중앙 통일전선부장을 맡게 된다.

지방관료와 농업부장 시절 인민에게 친근한 인상을 줬던 그는 통일전선부장을 맡은 이후 티베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강경한 입장을 펼쳐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둔 그해 3월 티베트 분리독립 문제로 인한 유혈사태가 불거졌을 때도 그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두칭린 통일전선부장은 올림픽 개최에 앞서 티베트 특사들과의 회담에서 달라이 라마는 반드시 베이징 올림픽을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폭력을 선동하지 않았음을 “공개적이고 명백하게”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그해 11월 두칭린은 베이징에서 달라이 라마의 개인 대리인과 회견했을 때 ‘세 가지 견지’, ‘세 가지 금지’를 주장했다. ‘세 가지 견지’란 중공의 지도를 견지하고 중국특색 사회주의제도를 견지하며 민족구역 자치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두칭린은 ‘세 가지 견지’에 대해 흔들림없이 철저히 실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세 가지 금지’란 ‘티베트가 독립하면 안 된다’, ‘절반의 독립을 해도 안 된다’, ‘변형된 독립도 안 된다.’는 것으로 이 역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