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내게 가상의 공간이자, 끊임없이 움직이는 공간"

2011-04-27 23:36
<박현주기자의 아트人> 갤러리시몬서 개인전여는 미디어 아티스트 강애란

작가 강애란씨가 이번 전시에 새로 선보이는 회화작품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마네 드가의 책더미 그림은 조명을 끄자 책모서리마다 LED로 만든 글자가 흘러 조명처럼 빛난다.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마음에 드는 책을 한권 들어보세요.". 2층 전시장 입구에 가지런히 놓여진 책들. '에드가 앨런 포'의 책을 집어들었다. "안으로 들어와 저 선반위에 올려놓아보세요." 가슴에 품은 'LED 형광색으로 발광'하는 책을 선반위에 놓자 어두컴컴컴한 전시장에 시를 읊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벽에는 '포의 시'가 영문자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손대면 톡 터지는 봉숭아처럼, 그저 프라스틱 가짜 책을 선반에 올려놓았을 뿐인데 터져나오는 남자의 목소리와 온몸에 투사되듯 상영되는 텍스트는 진짜와 가짜의 은밀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저에게 책은 가상의 공간이고 비물질적인 공간이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공간이죠. 텍스트를 넣어 책의 ‘비물질성’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기계를 이용해 회화보다 진보적이라는 느낌때문이었을까.  서울 통의동 갤러리시몬 전시장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강애란 작가(51. 이화여대 교수)는 의외로 중견작가였다.   미디어아트는  젊은작가가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트렸다.

그는 이미 10년전부터 붓을 버리고 '기계 책'을 탄생시켜  '디지털 북'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다.

이번 전시타이틀은 '빛을 발하는 시'( Luminous Poem)이다.

디지털북을 서가처럼 배열한 1층 전시장은 거울을 붙여 공간감을 더했다. 

작품이 작품속에 관통되는 일루전, 실제와 가상, 존재와 부재사이에서 혼란스럽게 한다. 책모양의 플라스틱 박스는 검은선들이 이어져있다. 전기잭을 목 뒤에 꽂아야 과거와 미래속에 살아나는 영화 매트릭스처럼 전시장의 수많은 '기계 책'들은 부활을 꿈꾸는 듯 형광색으로 반짝반짝 박동하고 있는 듯 했다. 

갤러리시몬 전시장 1층에 전시된 '디지털 북 프로젝트'

(회화)그림이 아니어서일까.   그는   '비물질성'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책은 단순히 오브제로서의 물질적인 개념만이 아닌,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비물질의 공간으로의 설정됩니다."

LED조명을 단 책들이 네온싸인 반짝이는 거대한 설치작품앞에서 가짜와 진짜를 왕래하는 '비물질성'은 자꾸만 목에 걸렸다. 

"책 자체는 물질적인 것이지만 ‘생각을 담는 주머니’라고 보면 비물질적인 것이죠.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과 관념에 생명을 부여하는 비물질적인 매체를 책이라고 생각해요.” 

물질과 비물질, 이것은 작가의 화두다.  그의 작품은 비물질(회화)에서 물질(미디어 아트)로 나오고 다시 물질은 비물질도 환원됐다.
 
디지털 북 프로젝트, '기계 책'이 나오기까지 강애란은 '보따리 작가'로 기억된다. 
86년 대학원시절 했던 보따리 그림은 12년간 계속됐다. 

한국적이고 여성적인 오브제, '보따리'는 강애란의 '생각 주머니'였다. 

채색위주의 화려한 보따리들, 하지만 싸기만 하는 보따리는 답답했다. 97년 부드럽고 비정형적이던 보따리가 사각삼각 등 기하학적인 형태로 변모했다. 보따리안에 든 것은 책이었다. 2000년부터 작업은 급격히 변했다. 

보따리를 풀고 책을 해방시킨 것. 보따리에서 벗어난 책은 작가의 새로운 모티브가 됐다. "책의 무덤이 발견된 500년후에도 지식의 빛은 발할 것"이라는 작품 메시지를 통해 확장된 매체로서 진화된 새로운 종의 '기계 책'이 탄생된 것이다.

99년 '실제와 가상 프로젝트'에 이어 2000년 이후 현재까지 작가는 미디어 아트 '디지털 북 프로젝트'를 작업하고 이다. 보기만 하던 '기계 책'을 만지고 읽게 하고 촉각적 전자도서도 만들었다. 2009년 독일 칼스루헤 ZKM과 갤러리시몬에서 사각의 구조물로 만들어진 '책 읽어주는 방'을 발표,미디어아트 작가로 주목받았다. 

'디지털 북 프로젝트'는 한단계 더 나왔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은 LED조명과 회화를 연결했다. 그림속 책더미에서 글자들이 흘러가는 기법이 다. 회화와 기계의 경이로운 결합이다.

"읽는 책이 아닌‘인식하는’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상상 속으로만 생각하는 책의 무궁무진한 내용을 가시화하는 것이 바로 제 ‘디지털 북 프로젝트’입니다.”

LED조명과 만난 '프라스틱으로 만든 책'은 글자가 계속 흐른다.

작가는 '빛에서 탄생한 인상파'의 후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것일까. 레진을 사용한 작품은 유리처럼 반짝이고 그 사이로 인상파(Impressionnisme)라는 단어가 이어진다.

"원래 그림을 전공해서인지 그림에 대한 향수 같은 게 있었어요. 비록 책의 개념이 바뀌고 미래지향적이 되었지만 여전히 책의 모습에 연연하는 내 마음 속의 향수라고나 할까요. 저는 책이 ‘나는 살아있다’ ‘공간이다’라고 말해주길 바라는데 사진이나 그림은 멈춰 있는 상태라 제가 생각하는 책의 개념을 표현하기엔 맞지 않았어요. 그러다 움직이는 텍스트를 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몇번의 시행착오와 실패끝에 이렇게 성공했죠. 해보니 만족스럽네요.” 

전기선을 연결해야 빛나던 '기계 책'은 이제 밧데리로 빛을 낸다. 전기선을 벗은 '가짜 책'은 자유로웠다. 책꽂이에, 식탁에, 탁자에 놓여져 '진짜 책'의 자리를 대신하며 빛난다.

작가는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후 일본 다마 미술대학에서 석박사를 마쳤다. 87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서울국제판화 비엔날레 대상, 석남미술상등을 수상했다. 전시는 28일~ 5월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