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헌규의 중국이야기 14-4> 홍위병에서 소황제(독생자) 세상으로…

2011-05-03 09:27
14 중국사회의 신성장 동력, 바링허우(1980년이후 출생자)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베이징 시내 차오양(朝陽)구의 상다오(上島)라는 한 찻집에서 1980년생 바링허우 자오(趙)씨를 만난 적이 있다. 외국인 회사에 다니는 한족 자오씨는 헤이룽쟝(黑龍江)성 하얼빈 교외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지난 60년대 초반만해도 북한과 인접한 중국 동북지역의 적지않은 주민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월경을 했다고 합니다.”

자오는 내가 한국사람인 것을 의식한 듯,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조부에게 들은 얘기라며 이런 말을 들려줬다.

자오네 가족은 북한으로 넘어가는 대신 랴오닝(遼寧)성의 다롄(大連)으로 이주해 왔다. 자오네 집이 이사할 수 있었던 것도 문화혁명이 종료되면서 체제개혁으로 단위(사회주의 시절 소속 기관및 직장의 개념으로서 의식주는 물론 개인의 삶 전체를 관장함) 이탈과 주거 이전이 다소 자유로워진 덕택이다.

자오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무렵인 80년대말과 90년대초. 자오의 부친은 아이의 교과서를 보고는 입버릇 처럼 “세상이 정말로 많이 달라졌어”라고 말했다. 과목을 불문하고 사회주의와 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 일색이던 교과 내용이 바뀐 것을 두고 한 얘기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늘 1,2등을 했던 자오는 관례대로 담임 교사로 부터 공청단 가입을 권유받았다. 부모님이 공산당원이어서 그 권유를 받아들일 만도 했다. 하지만 자오는 “공청단과 공산당에 신경쓰기 보다는 학교공부에 전념하고 싶다”며 완곡히 거절했다고 말했다.

자오는 1980년 지화성위(計劃生育 한자녀 정책) 정책이 시작되던 해에 태어난 전형적인 바링허우다. 정책이 막 시행됐던 한 두해 동안에는 당국에 출산 허락을 받으면 두자녀를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오의 부모는 공산당원으로서 당 정책에 모범을 보여야한다는 자각때문에 외동아들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자오는 결국 독생자인 샤오황디(小皇帝)가 됐다.

바링허우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중국은 경제성장에 따른 인재 수혈의 필요성에 따라 대학 문호를 대폭 넓혔다. 누구나 쉽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바링허우들은 개혁개방하의 대학 교육정책에 있어 최대의 수혜자인 셈이었다. 바링허우 직전세대들만 해도 대학은 물론 대부분 교육기관이 폐쇄된 암울한 상태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바링허우 직전 세대들만해도 학교 캠퍼스에서 떨어지고 손에서 책을 멀리 할수록 사회로부터 칭송을 받고 싹수 있는 인민영웅 감으로 여겨졌다. 캠퍼스를 기웃거리고 두터운 안경 너머로 책장이나 넘기는 젊은이는 줏대 없고 나약한 존재로서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학문과 전문적인 지식, 전통 문화, 실용주의적 행동방식은 사회주의 건설을 최우선으로 하는 문화대혁명의 이데올로기 앞에 모두가 타도의 대상일 뿐이었다.

국가 최고의 과학기술자와 경제학자들은 산간 벽지에 하방(노동개조를 위해 시골로 내려감)돼 밭을 갈거나 돼지 우리 청소원으로 소일하고, 전자 부품 납땜질 같은 단순 노동에 종사하도록 강요받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권력의 정점에 있던 마오쩌둥과 4인방 처럼 마오를 등에 엎은 불온한 정치꾼들에 의해 죄지우지됐다.

이들은 검은 장막 배후에서 당시의 바링허우격인 10대 홍위병을 조정해가며 전국적으로 정치적 탄압과 야만적 파괴행위를 자행해 나갔다. 영화 ‘찬란한 태양이 빛나던 시절(陽光燦爛的日子)’의 주인공은 바링허우들의 바로 앞 세대로서 문화혁명이 초래한 교육암흑기에 중국의 10대 청소년들이 어떤 고민속에서 무얼하며 보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