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영화 왜?> 황산벌 그후 8년, 평양성에선 무슨일이

2011-01-26 17:03

(아주경제 김재범 기자) 이준익 감독을 일컬어 ‘사극의 대가’라 부른다. 그의 작품은 일단 기본적인 기대치가 있다. 1000만 관객 신화를 쓴 ‘왕의 남자’부터 초기 연출작 ‘황산벌’과 최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까지 여러 작품에서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해학이 빛을 발했다.

특히 황산벌은 ‘신랄한’ 현실 풍자에 영화적 상상력과 코믹을 접목시켜, 기존 사극의 전형성을 깨트린 새로운 장르적 실험의 성공 케이스로 평가받았다. 흥행은 덤이었다. 이후 8년의 시간이 흘렀고, 영화 ‘평양성’의 뚜껑이 열렸다. 뚜껑 안에 든 내용물은 어떨까.



우선 시간적 흐름의 공백을 매울 임팩트가 부족해 보인다. 전작 황산벌은 사극 전쟁물임에도 불구하고 ‘사투리’가 접목된 시대상에, 피가 튀는 액션이 배제된 다양한 싸움신이 관객들에게 색다름으로 다가 왔었다. 주인공 김유신(정재영)과 계백(박중훈)의 투톱 대결에 거시기(이문식)란 양념이 추가돼 중간 중간 느슨해지는 관객들의 시선 유지도 돋보였다.

다시 평양성으로 돌아오자. 역사의 흐름으로 10여년이 흐른 배경 속에서 바뀐 부분은 대상뿐이다. 신라 대 백제의 대결 구도인 황산벌이 평양성에선 신라 대 고구려로만 바뀌었을 뿐, 기본 틀은 같다. 영화 자체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기에 평양성 전투를 신라와 일본의 대결로 그릴 순 없었겠지만, 뭔가 새로움에 목말라 있던 이 감독의 팬 입장에선 다소 실망감이 앞선다.



우선 평양성은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작품이다. 기존 줄거리야 중 고등학교 학력 수준이라면 누구나 짐작하고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준익은 뭔가 있지 않을까’란 기대감이 평양성에 대한 첫 인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황산벌의 아우라를 벗어나기엔 그 빼어남이 못 미치는 듯하다. 전작에서 쏠쏠한 재미를 본 사투리 향연은 이미 관객들이 미뤄 짐작한 내용이다. 사투리 한마당을 통한 소소한 재미의 기대치는 전작에 비해 상당부분 감소됐다.



조그만 사건 하나도 정성스레 눈길을 쏟는 이 감독 특유의 연출 스타일도 이번 평양성에선 더욱 도드라졌다. 워낙 많은 캐릭터들에게 공통된 시선 분배를 한 까닭에 영화 후반부엔 감상의 방해물도 작용한다. 김유신의 능청스런 연기와 남건과 남생의 대립각, 거시기와 갑순의 러브스토리, 경상도 사투리의 감칠맛을 보여주는 문디(이광수)의 출연에 당나라 장수들의 꼼수까지 관객들의 입장에선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할 정도다.

즉 신라왕으로 출연한 황정민의 ‘미친 연기’로 포문을 연 평양성은 거시기의 출연으로 기대감을 상승시킨 뒤, 김유신의 혜안이 꿰뚫은 전쟁의 이면을 주목하는가 싶더니, 남건과 남생의 형제애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시기를 통한 민초들의 고통으로 영화를 매조지한다. 지금의 어지러운 현실과 접속을 시도한 노력이 가상하지만 너무 산만하다.



다만 여러 얘기를 풀어가는 배우들의 연기 보는 맛은 탁월하다. 이 감독의 ‘분신’ 정진영이 연기한 노쇠한 김유신은 극중에서 판세를 손에 쥔 듯 유려한 밀고 당기기로 발톱을 감춘 늙은 사자의 위엄을 뿜어낸다. 고구려의 수장으로 출연한 남건과 남생의 류승룡, 윤제문은 코믹한 분위기 속에서도 나름 무게감으로 존재를 각인시킨다.



무엇보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단연코 거시기다. 이문식은 전작 황산벌에서 보여준 찌질이 캐릭터를 평양성에선 힘없는 민초들의 대변인으로 승화시켰다. 영화의 결말에서 보여준 거시기의 모습은 당초 3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의 마지막 3편에서의 활약도 기대케 한다.



카메오들의 힘도 대단하다. 이 감독을 비롯해 ‘충무로 키드’ 류승완 감독의 깜짝 출연과 ‘달인’ 콤비 김병만과 류담은 나름의 웃음코드로 영화의 쉼표를 찍는다.

무엇보다 평양성이 숨기고 있는 비장의 카드라면 신라왕으로 출연한 황정민의 ‘미친 존재감’이다. 영화를 본다면 왜 그에게 ‘미친 존재감’이란 찬사를 보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개봉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