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가 1 -프롤로그] 가장 한국적인 기업, 現代
현대그룹 계동사옥 앞 現代가 새겨진 표지석 모습. 이 표지석은 1983년 준공 때 설치됐으며, 그룹 해체기인 지난 2002년 치워졌다가 2008년에 다시 세워졌다. 뒷부분에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창업한 현대그룹의 연혁과 이명박 대통령의 현대건설 사장 취임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사진=김형욱 기자)
현대가, 특히 창립자인 정주영 명예회장에 대한 기록은 무수히 많다. 그의 자서전만 수권, 그를 다룬 책도 현재 시판 중인 것만 10여권이 넘는다. 그의 경영철학을 언급한 책은 셀 수도 없다.
그럼에도 매번 현대가와 정주영 전 명예회장에 대한 일화가 회자되는 이유는 시대에 따라 재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에 재해석이 필요하듯이.
그리고 또 창업주가 고인이 된 지 9년을 지나 10년째를 향해 가고 있지만 현대라는 이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을 필두로 현대라는 이름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에 본지는 정주영 회장과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을 중심으로 한 현대가의 변천사, 그리고 그 미래를 20주에 걸쳐 연재한다.
이 내용은 연재 마무리와 함께 내용을 더 보충해 책으로도 출간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아주경제 김형욱 기자)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210번지. 금강산 자락의 50호 남짓한 한 시골 중농 집안에 첫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눈이 집을 덮을 정도의 산골 자락이었다.
5남 2녀의 장남인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울로 가출했다. 이후 막노동일과 쌀가게 배달부를 거친 끝에 타고난 농사꾼 특유의 부지런함과 신용으로 쌀가게 주인이 됐다.
그는 해방 전후에 자동차수리업을 시작으로 건설·중공업·자동차 등 각종 사업에 나섰고 해방, 6·25 전쟁, 군사 독재, 민주화 운동이라는 격변의 한국사에 한 획을 그은 국내 최대의 경영인이 됐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 (사진=정주영 명예회장 사이버 박물관) |
그는 평소 재벌이라 불리는 걸 싫어했다. 헤진 옷은 기워 입었으며, 국내 최대 부자가 됐을 때도 20년 넘게 한 구두를 신을 만큼 지독하게 절약했다. 입버릇처럼 “나는 아직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말하길 좋아했다.
2000년 들어 현대그룹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정 전 회장 사후 그룹은 5~10여개로 뿔뿔히 흩어졌다. 정몽구 회장이 이끌고 있는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을 필두로 현대중공업, 현대그룹, 현대백화점그룹 등이 대표적.
하지만 그의 경영철학은 여전히 한국 곳곳에 숨쉬고 있다. 일 안하는 사람은 밥도 먹지 말라며 채근하는 정주영의 모습은 경영자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지금도 그의 경영 철학이 온전히 남아 있는 범 현대그룹 직원들은 그를 ‘왕회장’이라는 애칭 혹은 존칭으로 부르며 존경심을 보인다.
장남 정몽헌 회장이 작고한 뒤 장남 역할을 하게 된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 역시 그의 DNA를 빼다 박았다는 게 그를 지근거리에서 모셔 왔던 측근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이 같은 현대가의 분위기는 90년 남짓한 한국 기업사에 이질적인 존재다. 땅도 밑천도 없던 한 개인이 세계 굴지의 대기업을 일궈낸 점 때문에 해외에서도 존경의 눈으로 보고 있다.
현대라는 회사 이름도 어찌 보면 촌스럽다. 국내 주요 그룹들은 2000년을 전후로 소위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바꿔 왔다. 금성이 LG로 선경이 SK로 포항제철이 POSCO로 바뀌었다. 그럴 듯 하다.
하지만 현대는 어디까지나 현대다. 가장 한국적 색채가 강한 기업으로도 꼽힌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한국의 발전상이 현대그룹의 성장과 맥을 같이해 왔기 때문이다.
‘하면 된다’는 현대의 우직함은 한국의 정서와도 맞는다. 때론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다. 논픽션 작가 홍하상은 이를 ‘단순해서 아름답다. 무모해서 강력하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치밀한 계산, 선견지명, 철저한 관리를 보고 있노라면 ‘아!’ 하는 탄식이 튀어나온다.
한편 필자는 본지 현대가 시리즈를 연재가 결정된 이달 초부터 두 권의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과 함께 시판 중인 대부분 관련 책자를 이 잡듯 뒤졌다.
또 주말을 이용, 전국 각지에 정 회장이 일군 주요 사업장을 돌아봤다. 현재 길이 막힌 금강산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격전지’는 다 둘러봤다고 자부한다.
가까이는 6·25 재건사업의 대표작 한강 인도교, 경부고속도로 건설 최대 난관이었던 대전~옥천 구간이 있다.
1967년 정주영 명예회장이 특유의 추진력으로 건설한 동양 최대의 사력댐 소양강댐 하류쪽 모습. (사진=정주영 명예회장 사이버 박물관) |
특히 지난주에는 마지막으로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현대가의 선영에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갔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연재에 앞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이 모든 준비는 한 달 안에 마무리했다. 연재 역시 통상적으로 일정 분량을 미리 써 놓는 대신 취재와 함께 연재를 병행할 계획이다. 이를 현대 특유의 ‘돌관작업’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으로 해 두자.
특히 그 동안 우직한 것으로만 알려진 현대그룹의 역사 속에 숨겨진 경영자의 치밀함과 선견지명, 현대기아차를 중심으로 범 현대그룹의 미래를 조망할 계획이다.
또 뒷부분부터 3세 경영의 중심에 선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장남, 정의선 부회장의 경영론에 대해서도 다뤄 볼 참이다.
이에 대한 책자는 여지껏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분적으로나마 이번이 첫 시도인 셈이다. 미흡한 부분은 후일 더 우수한 분께서 잘 정리해 줄 것으로 믿고 첫 발을 내딛는다.
시작에 앞서 부담과 함께 ‘짜릿함’을 느낀다. 마치 ‘왕회장’이 해외 어딘가의 미지의 땅에서의 첫 사업을 시작했던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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