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車업계..'노사상생' 절실

2009-06-05 14:09


한국 자동차 업계의 노사 관계에 새 바람이 불 수 있을까.

전 세계적 경제위기와 극심한 불황 속에 자동차 업계가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가운데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돼온 업계 노사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올 수 있을지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바야흐로 지금은 변혁의 시기. 세계 차 생산 1위였던 미국의 GM과 크라이슬러가 잇따라 파산보호를 신청하고 이 과정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세계 자동차 메이커들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시장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업체간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상생하고 화합하는 노사 관계라는데 이견이 없다. GM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몰락한 배경으로 회사의 미래를 생각지 않는 소위 '귀족노조'가 있었기 때문이란 평가에서다.

◇ 국내는 아직도 먼 상생의 길 = 올해 국내 차 업계에도 사상 최대의 불경기가 닥쳤지만 노조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법정관리 중인 쌍용차는 경영정상화를 위해 2천646명에 대한 인력감축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한 노조는 지난달 22일부터 평택공장을 점거하고 총파업을 벌이고 있다.

쌍용차 노조는 26일부터는 사무 직원들의 출근마저 저지하면서 옥쇄파업을 지속하자 회사 측은 노조 총파업에 맞서 지난달 31일 평택공장에 대한 직장폐쇄 조치를 취했다.

회사 측은 경찰에 회사 시설물 보호를 요청하고 노조 및 외부세력의 불법행위에 대해 민.형사상 고소 고발, 손해배상 청구 등 모든 조치를 통해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지만 노조 측은 파업을 풀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사 측은 정리해고가 시행되는 오는 8일 이후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겠다고 밝혀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경찰력에 의한 강제 퇴거라는 물리적 충돌도 불가피해 보인다.

임금협상을 진행 중인 현대기아차 노조는 일찌감치 회사 측에 엄포를 놓고 있다. 현대기아차그룹 15개 계열사 노조 간부들은 지난달 말 성명을 내고 "회사 측이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진행할 경우 계열사 노조가 연대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구조조정 얘기는 아직 본격적으로 거론되지도 않았지만 노조는 일찌감치 투쟁의지를 다지고 나선 것이다.

민주노총 화물연대가 오는 11일 총파업을 예고한 가운데 금속노조는 10일 부분 파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금속노조는 지난 3일 파업 중인 쌍용차 노조원들과 공동집회를 갖고 쌍용차의 인력감축을 규탄하기도 했다.

◇ 뒤늦게 후회하는 美자동차노조 = 로이터 통신은 최근 얼마전까지만 해도 전미자동차노조(UAW)의 조합원이 되는 것은 중산층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지만 자동차 업계가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이제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고 보도했다.

조합원들에게 유급휴가와 연금, 건강보험 등 각종 혜택을 주며 중산층의 꿈을 실현하게 해준 UAW가 최근 파산보호로 몰린 크라이슬러, GM과의 협상에서 대폭적인 양보를 했기 때문이다.

UAW는 2015년까지 GM과 크라이슬러 사업장에서 파업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UAW의 무파업 약속은 노조 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두 회사의 잇단 파산보호 신청의 배경에 노조의 잦은 '파업카드'와 사측에 대한 무리한 요구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인정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출범한 UAW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에 경제가 살아나고 자동차 판매가 급증하면서 사측에 보다 많은 혜택을 요구했고 근로자의 협조를 필요로 했던 사측이 이에 응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미국 자동차가 일본 자동차에 밀리기 시작한 상황에서도 UAW가 누린 혜택은 계속돼 현직 근로자보다 퇴직자에게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기형적 구조가 나타났다. 이는 미국 '빅3' 업체의 재정적 압박을 가속화했고 노조와 회사는 결국 공멸의 길을 피하지 못했다.

셰이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UAW의 과감한 양보에 대해 "GM을 일단 살려내고 GM이 회생하게 되면 다시 투쟁에 나서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파산의 위기에서 노조가 좀더 일찍 회사의 미래를 생각했다면 현재의 참담한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는 공감대는 계속 확산되고 있다.

◇ 달라지는 것들..'희망은 있다' = 자동차 업계의 현장에 격렬한 노사 대립과 갈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자동차 노조는 비교적 강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사상 유례없는 경제위기를 맞아 사측과 손잡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회사를 투쟁과 쟁취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서 탈피, 함께 나아가야 할 동반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기아차의 공장간 일감나누기와 혼류생산은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 공동대처의 대표적인 사례다.

현대차 노사는 지난 3월 말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1차 과제로 꼽혔던 소형차 생산과 판매 확대를 위한 공장간 일감나누기에 전격 합의, 위기 극복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합의에 따라 현대차는 그간 수출이 밀린 아반떼를 울산2.3공장에서 공동생산하게 됐고 울산 1공장에서 소형차인 베르나 생산도 늘릴 수 있게 돼 소형차 수출 확대에 청신호가 켜졌다.

공장간 생산 불균형은 해소됐고 조합원간 임금격차도 줄어 고용안정도 꾀할 수 있게 됐다. 노사는 이번 합의를 계기로 물량공동위를 공장간 생산물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상설 노사 협의체로 운영하기로 했다.

기아차는 지난해 12월 대형 RV차량 카니발을 생산하던 광명시 소하리 1공장에서 소형차인 프라이드의 혼류생산을 시작했다.

이는 유연한 생산체제를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사 공동 노력의 결과로, 기아차는 생산 물량이 줄어든 카니발 라인에서 국내외 수요가 늘고 있는 소형차 프라이드를 생산, RV 수요는 감소하고 소형차 수요가 증가하는 시장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됐다.

기아차는 경제위기 극복에 노사가 공동 노력하자는 내용의 '노사합의문'도 발표했다. 합의문은 자동차산업 위기극복, 평생일터 실현, 투명한 노사관계 구축, 성공적 신차 확보 및 안정적 라인 운영, 지속적인 사회공헌 활동 등을 담고 있다.

기아차는 또 지난 4월 서울모터쇼 프레스데이 행사에서 김종석 노조 지부장이 노타이 세미 정장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신제품 홍보에 나서 위기극복을 위한 회사 측 자구노력에 노조가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줬으며, 최근에는 노조와 우리사주조합이 공동 판촉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 일부 기업들의 노사 상생선언 = 노사가 함께 고통분담을 통해 경제 위기의 충격을 벗어나려는 회사도 점점 늘고 있다. 지리한 협상과 투쟁으로 이어지는 임단협으로 인한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지난 연말 임금 문제를 회사에 일임하고 이에 화합한 사측이 2011년까지 고용을 보장하겠다고 한데 이어 메리츠화재 노조가 임금을 동결하고 성과급 지급여부를 회사에 맡겼고 사측은 '고용안정 협약서'에 서명했다.

㈜행남자기, ㈜포스코특수강도 임금동결과 고용유지를 골자로 한 양보교섭을 선언했다.

영진약품도 비정규직 일부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경영진이 임금의 30%를 반납하자 노조는 회사 경영이 정상화되고 이익이 실현될 때까지 임단협 교섭을 유보하기로 했다.

울산 삼창기업, ㈜동성화학, ㈜선광도 임금협약을 모두 사측에 위임한다고 밝혔다.

현대기아차그룹의 협력업체인 위스코 노조도 지난 4월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화합을 선언하고 올해 임금에 관한 사항을 회사에 위임했다.

모기업인 GM이 파산보호를 신청한 GM대우는 임금을 삭감하고 한시적으로 복지제도를 축소하고 있다. 5월부터 일반 사무직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1시간 줄였고 이에 따라 사무직 임금도 임원들과 같이 10% 줄어들게 된다.

GM대우는 이미 임원들의 보수를 5월부터 10% 삭감하기로 했으며 노조와는 체육대회 및 야유회, 하계 휴양소 운영, 장기근속자 위안잔치, 퇴직금 중간정산, 고정 연차(연간 10일) 지급 등 복지제도를 한시적으로 중단하는데 합의했다.

◇ "지금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때" = 각사 노조와 상급단체의 강경 투쟁 움직임에 대해 자동차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전의 자동차 판매 실적을 회복하는데 5-6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현실에서 올해 '투쟁' 위주의 임금협상이 진행되면 위기에서 기회를 만들기도 전에 경쟁에서 뒤쳐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노사가 위기감을 가지고 국민경제에 대한 책임감,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 이를 바탕으로 신뢰기반을 구축해야만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업체마다 처한 환경에 따라 생산적.협력적 노사관계의 내용과 방식이 상이함을 감안할 때 한국의 노사관계 현실을 반영한 한국적인 노사관계 모델을 찾기 위해 노사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자동차학)는 "미국 내 현대기아차 시장점유율은 유럽이나 일본 업체들과 함께 올라갈 것이지만 2-3년 뒤는 장담할 수 없다"며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업체들은 취약점인 노사 관계를 선진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인터넷뉴스팀 news@ajnews.co.kr
아주경제=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