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더 큰 미래, 국방·보훈·방산]-④ 우국충절 지사는 102년전 떠났지만…글씨는 아직 우리 곁에
2024-08-16 00:00
동농 김가진 선생의 나라사랑·글씨사랑
1919년 74세때 상하이행 망명열차
임정서는 "천군만마"…3년 후 서거
시문·서예 대가·전국 곳곳에 흔적
유홍준 "독립문 현판 글씨 주인 김가진"
1919년 74세때 상하이행 망명열차
임정서는 "천군만마"…3년 후 서거
시문·서예 대가·전국 곳곳에 흔적
유홍준 "독립문 현판 글씨 주인 김가진"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0월, 74세였던 동농 김가진(1846~1922)은 낡은 모자와 해진 옷을 걸치고 상하이로 향하는 삼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제의 눈을 피해 한국을 떠나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노대신이었던 그는 독립만을 열망했고 그렇게 상하이에 도착했다.
김가진이 상하이로 떠나며 읊은 시는 당시 독립신문에 실렸다. 그는 “치욕스러운 마음으로 죽음을 참으며 여태껏 살아왔다. 늙은 몸이 상기도 하늘 찌를 뜻을 품었기에 단숨에 하늘 높이 몸을 솟구쳐 만리 길을 떠났노라. 민족 국가의 존망적 위기에 내 몸만 돌보고 앉았으랴”라고 읊조렸다.
8·15 광복절을 이틀 앞둔 지난 13일 문화재정창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동농 김가진 서예전 ‘백운서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가진은 조선왕조 말기와 일제강점기라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우국충절을 보여줬다. 그는 농상공부 대신, 중추원 의장, 법부 대신 등 국가 고위직을 두루 거치며 조선왕조의 정치, 행정, 군사, 경제 등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쓴 영국인 아널드 새비지 랜도어는 “그는 내가 만난 수많은 외교관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김가진을 평가했다.
이처럼 명예로운 삶을 산 김가진은 74세에 임시정부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힘썼다. 유 교수는 “조선왕조에서 판서를 지낸 인물이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했다”며 “그가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임시정부 사람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가진의 글씨는 남았다. 그는 시문과 서예의 대가였다. 창덕궁 후원의 수많은 현판을 비롯해 전국의 관아와 사찰, 명소에는 그의 글씨가 걸려 있다. 김가진은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백운동 골짜기에 백운동천이란 거대한 암각 글씨를 새기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탁본의 대가로 통하는 흥선 스님 주도 아래 이뤄진 암각 글씨 탁본도 선보였다.
아울러 유 교수는 독립문 글씨 주인공이 이완용이 아니라 김가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서체를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며느리인 정정화 여사의 장강일기에도 그 얘기가 있다. 독립문 탁본이 있었지만 여러 차례 이사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특히 김가진의 서예 세계는 격동의 시대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그의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 교수는 “김가진은 존망의 위기 속에서 행서체를 통해 결의를 표현했다”며 “행서체를 쓴 것은 그가 살던 시대가 멋을 부릴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가진을 비롯해 유길준, 김옥균, 박용균 등 이들 독립운동가는 행서체였다”고 덧붙였다.
어린 시절부터 서법을 익힌 김가진은 이불과 넓적다리에 글을 쓸 정도로 붓글씨에 심취했다. 먹이 귀해 지팡이로 땅에 글을 쓰며 서예를 연마했다.
광복절에 김가진의 서예를 감상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김가진의 집안은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까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정정화 여사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위해 국경을 넘나들며 독립자금을 조달하다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회고록 장강일기는 임시정부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들 김의한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아들, 며느리, 손자 모두가 애국훈장을 받은 것과 달리 김가진은 이를 받지 못했다. 일제의 남작 작위를 훗날 반납했지만 이를 받을 때 바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의 유해는 여전히 홀로 상하이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