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민의 문화살롱] '문제아' 로미오와 줄리엣의 불꽃같은 사랑…익숙한데 낯설다

2024-05-13 06:00
청소년 교정시설에서 만난 두 사람
약물 등 오늘날 10대 이야기로 변주
손끝·발짓 통해 감동과 놀라움 선사

매슈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두 주인공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장면 [사진=LG아트센터 서울]

 
“제가 해석하는 많은 작품이 관객들에게 매우 사랑받고 있는 이야기인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사람들이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모든 사건들과 감정 등을 보여주긴 하지만,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놀라움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국 출신 안무가 매슈 본은 익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변주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백조의 호수’에서는 가녀린 여성 백조 대신 근육질 남성 백조를 내세웠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현대의 뱀파이어 이야기로, 오페라 ‘카르멘’을 자동차 정비소를 배경으로 한 ‘카 맨’으로 바꿔놨다.
 
매슈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지난 8일부터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되고 있다. 201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평단과 관객의 호평에 힘입어 매슈 본의 새로운 대표작으로 인정 받고 있다. 2023년부터 런던을 시작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프랑스 파리, 일본 도쿄를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월드 투어를 펼치고 있다.
두 주인공이 매슈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아름다운 2인무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LG아트센터 서울]
 
베일을 벗은 ‘로미오와 줄리엣’은 놀라움을 줬다. 춤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다양한 감정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며 감동을 선사했다.
 
매슈 본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불멸의 로맨스이자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걸작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창조했다.
 
새하얀 타일로 둘러싸인 벽, 경비원들의 규율과 통제로 가득한 ‘베로나 인스티튜트’. 어른들에 의해 '문제아'로 분류된 청소년들을 교정하는 이곳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두 남녀는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위험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매슈 본이 주목한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에 담긴 필연적이고 아름다운 비극성이다. 그는 약물, 트라우마, 우울증, 학대, 성 정체성 등 현대의 젊은 세대가 마주한 민감한 문제들을 거침없이 묘사하며 ‘로미오와 줄리엣’을 오늘날 10대들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매슈 본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젊은 무용수들, 모든 부문의 젊은 창작자들에게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를 만들기로 결정했다”며 “어린 두 남녀의 궁극의 첫사랑을 그린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재능과 시각에서 영감을 얻어야 했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또 새로운 세대에 관한 ‘로미오와 줄리엣’인 셈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2018년 영국 전역에서 만 16세에서 19세 사이의 무용수들을 선발하는 대규모 오디션을 개최했다. 1000명 이상의 지원자 중 워크숍 공연과 트레이닝을 거쳐 다수의 무용수를 정식 단원으로 합류시켰다. 실제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는 사람 같은 무용수를 캐스팅해 관객이 더욱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2019년 초연부터 로미오 역을 맡고 있는 파리스 피츠패트릭과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발탁돼 단기간에 주역 무용수 자리를 꿰찬 한나 크레머는 10일 공연에서 첫사랑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오롯이 표현했다. 객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나왔다. 
 
사회적인 문제를 표현한 것에 대해 매슈 본은 “무용 공연에서 이런 이슈들을 다루면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나 TV 드라마, 연극에서는 흔하게 다루어지는데도 말이다”라며 “우리가 만든 ‘로미오와 줄리엣’에 때로 보기 힘든 장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줄리엣의 참혹한 이야기가 그렇다. 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현실과 그 비극적 결과를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매슈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한 장면 [사진=LG아트센터 서울]
 
매슈 본은 20대 여성 안무가 아리엘 스미스와 협업해 다른 어떤 작품보다 힘있는 안무를 만들었다. 무용수들은 공연 내내 끊임 없이 뛰고 움직이며 고난이도의 동작을 펼친다. 특히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이 펼치는 2인무(파드되)로 유명한 ‘발코니 신’은 신선한 놀라움을 준다. 말과 이성으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첫사랑의 감정을 춤으로 오롯이 전달했다.
 
매슈 본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발코니 듀엣'이다. '역사상 가장 긴 키스' 장면이 포함돼 있다”며 “이 장면은 캐릭터들이 진정한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첫 순간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음악은 새로운 이야기와 스타일에 맞춰 약간의 변화를 줬다. 작곡가 테리 데이비스와 15인조 앙상블이 편곡 작업에 참여했으며, 원작 악보(오리지널 스코어) 51개 중 30곡을 골라 순서를 재배치하고 5곡의 신곡을 추가했다. 이를 통해 원작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이고 강렬한 음악이 만들어졌다.
 
매슈 본은 “대사보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은 음악이었다. 음악은 내게 대본과 같다”며 “내게는 프로코피예프의 믿을 수 없는 악보가 있었다. 정말 현대적인 영화 음악처럼 느껴지며, 많은 부분에서 환상적인 댄스 음악이다. 음악을 듣고 대본으로 활용했다”고 작업 과정을 설명했다.
매슈 본 [사진=LG아트센터 서울]
 
놀라운 작품의 중심에는 매슈 본이 있다. 1987년 자신의 댄스 컴퍼니를 창단한 그는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카 맨’, ‘가위손’, ‘레드 슈즈’ 등 고전을 새롭게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한 일련의 혁신적인 댄스 뮤지컬을 선보임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무용 작품 외에도 ‘올리버’와 ‘메리 포핀스’ 등 다양한 뮤지컬의 안무와 연출을 맡았으며, 영국 최고 권위의 올리비에 어워드 9회 수상을 비롯해 토니상 최우수 안무가상, 최우수 연출가상 등 국제적인 상을 40여 개 받았다.
 
그는 2016년 5월 20일 영국 버킹엄궁전에서 열린 기사작위 수여식에서 영국황태자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이는 그가 지난 30여 년간 무용계에 공로한 기여를 인정받은 것으로, 발레가 아닌 현대무용계 인물에게 기사 작위가 수여된 최초의 사례다. 2020년 매슈 본은 9번째 올리비에 어워드를 수상하며 8회를 수상한 명배우 주디 덴치를 제치고 역사상 가장 많은 올리비에상을 수상한 아티스트가 됐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오는 1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되며, 이후 부산 남구 드림씨어터로 장소를 옮겨 오는 23일부터 26일까지 한국 관객을 만난다.
 
매슈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 포스터 [사진=LG아트센터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