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민의 문화살롱] '영롱함을 넘어서'…예술의 본질 찾아 물방울과 함께한 50년 여정
2024-04-29 06:00
김창열 화백 작고 3주기전
1971년 아침, 물 뿌려둔 캔버스에서
생명력 지닌 새로움과 운명적 조우
맺혀있는 것 넘어 다양한 형상 선봬
끊임없이 실험…주요작 38점 소개
1971년 아침, 물 뿌려둔 캔버스에서
생명력 지닌 새로움과 운명적 조우
맺혀있는 것 넘어 다양한 형상 선봬
끊임없이 실험…주요작 38점 소개
“예술의 본질은 결국 일루전(Illusion)일 텐데, 이것을 재검토해 보려는 게 나의 예술입니다.”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가가 평생 풀어야 할 숙명 같은 질문이다. 김창열 화백(1929∼2021)은 답을 찾기 위한 ‘50년 미적 여정’의 평생 동반자로 물방울을 택했다.
김창열 화백 작고 3주기 회고전 ‘영롱함을 넘어서’가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갤러리현대에서 개막했다.
1976년 갤러리현대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 중인 김 화백 초대전을 개최하며 그의 물방울 작품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했다. 고인의 마지막 전시가 된 2020년 ‘더 패스(The Path)’까지 열네 번의 전시를 함께하며 반세기 동안 소중한 인연을 이어왔다.
‘영롱함을 넘어서’ 전은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김 화백의 열다섯 번째 개인전으로, 물방울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탐구해 온 작가의 조형 의식을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전시에는 마대 위 물방울이 처음 등장하는 1970년대 초반 작품부터 2010년대 제작된 근작까지 김 화백의 예술 여정을 회고할 수 있는 주요 작품 38점이 소개됐다.
미술품 컬렉터(수집가)로도 유명한 방탄소년단(BTS) RM 등 다양한 소장가들의 작품을 한곳에 모았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전시다.
김 화백과 물방울의 운명적인 만남은 5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 미국 뉴욕에서 프랑스 파리로 예술의 터전을 옮긴 김 화백은 파리 근교 마구간에서 생활하던 중 1971년 어느 아침 재활용을 하기 위해 물을 뿌려둔 캔버스에서 물방울을 발견하게 된다.
1976년 현대화랑 개인전을 앞두고 11년 만에 고국에 온 김 화백은 미술평론가 고(故) 이일, 동료 작가인 고 박서보 화백과 나눈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물방울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캔버스를 뒤집어놓고 직접 물방울을 뿌려 보았어. 꺼칠꺼칠한 마대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의 무리들, 그것은 충분히 조형적 화면이 성립되고도 남질 않겠어. 여기서 보여진 물방울의 개념, 그것은 하나의 점이면서도 그 질감은 어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움의 발견이었어. 점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감도라 할까. 기적으로 느껴졌어.”(‘공간’ 1976년 6월호)
이후 김 화백은 물방울과 함께 예술의 본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갤러리현대는 “김 화백은 실제 같아 보이지만 철저하게 조형화된 물방울을 마(麻)천, 모래, 신문, 나뭇잎, 한자 등 실제 위에 놓음으로써 실재와 가상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중성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다”고 짚었다.
이번 전시는 50년간 물방울이라는 한 가지 소재만 탐구한 김 화백의 ‘미적 여정’을 소개한다.
1층 전시장에서는 1970년대에 김 화백에 의해 발견되고 선택된 물방울이 시간과 중력을 초월하며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에 나타나는 물방울들은 대체로 실제 물방울이 캔버스 위에 맺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김 화백의 독창적인 조형언어로 구축된 구도로 캔버스 화면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2층 전시장에서는 영롱하게 맺혀 있던 물방울이 중력과 시간을 거스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김 화백의 물방울은 단순히 맺혀 있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표면에서 흐르고 흡수되며 물방울이 가진 다양한 물리적인 형상을 선보인다.
전시작 ‘물방울’(1979)에서는 물방울들이 화면 한가득 맺혀 있으며, 그중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화면 위에 맺혀 있는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언뜻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물리법칙을 따르고 있는 물방울의 모습이다.
지하 전시장에서는 1980년대 이후 제작된 ‘회귀(Recurrence)’ 시리즈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회귀’ 시리즈 안에서도 작가의 다양한 변주와 실험이 존재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작가는 수많은 물방울을 연구하면서 이를 더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는 지지체를 찾는 실험에 몰두했다.
글자를 비롯한 다양한 표면과 물방울이 상호 작용하는 다양한 연출들을 살펴보면 작가가 가졌던 수많은 고민과 치열함, 조형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을 엿볼 수 있다. 물방울은 표면의 글자를 확대하거나, 가리거나 혹은 지워내기도 한다. 글자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글자 위에 색을 칠한 후 글자 부분만 뜯어내는 기법을 사용하거나, 글자 부분만 비워 놓고 색을 칠하는 등 다양한 기법 실험을 관찰할 수 있다.
‘회귀 DRA97009’(1997)를 보면 물방울 옆에 먹으로 글자가 지워져 있는데, 이는 마치 물방울의 그림자처럼 기능하며 제3의 공간을 형성한다. 전시는 오는 6월 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