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낙동강 개경포구(開經浦口)에는 감자꽃이 하얗게 피었는데

2024-04-29 09:46

[원철 스님]


경남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에서 열리는 ‘고려팔만대장경의 날’ 행사에 참석한 후 도반과 함께 경북 고령 낙동강변에 있는 한적한 옛 나루터를 찾았다. 비록 지금은 면사무소 · 파출소 · 보건소 건물이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시골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엄청나게 큰 강나루 마을이었다고 한다. 가구 수가 몇 백에 이르렀으며 수십 개의 객주(客主 상업 및 숙박시설)가 함께 하는 도진촌(渡津村 나루터 마을)이었다. 서해와 남해 그리고 낙동강을 따라 곡물류와 갖가지 어패류 그리고 소금을 실어나르는 배가 도착하면 상인들은 그 물건을 고령 성주 합천 거창 등 내륙지역으로 운반하던 유통거점인 까닭이다. 물산의 집산지이며 수로교통의 중계지인 동시에 교역장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에서 세금으로 받아 둔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인 강창(江倉)까지 있었다고 한다. 강창에 보관하던 곡식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세곡선(稅穀船)을 이용하여 한양의 경창(京倉 한강변에 있는 국가곡식 저장창고)으로 운반되었다.
[고령 개경포 팔만대장경 이운순례길 출발지]

 
물류는 생필품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조선 태조 7년(1398) 서울 용산구와 마포구 사이 원효대교 근처에 있었다는 지천사(支天寺)에서 이성계 임금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는 배에는 팔만장의 대장경판이 실려 있었다. 군사 이천여명이 동원되어 실었다고 한다. 물 불 바람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지리적 잇점을 지닌 경남 합천 가야산으로 옮겨 보존에 만전을 기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한양에서 출발하여 서해와 남해를 거쳐 낙동강을 따라 올라오던 배에서 내려진 대장경판은 관료와 승려 그리고 백성들에 의해 가슴에 안거나 등에 지거나 혹은 머리에 이거나 또 소 달구지에 싣고서 40km 떨어진 해인사로 옮겼다.
 
[개경포 표지석]

 출발점과 종착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만 중간과정에 대한 설명은 생략했다. 지역선비들의 문집에도 장대한 이동대열을 목격했다는 언급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남한강-문경새재-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육로이동설은 해로이동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가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해로이동설 역시 추측일 뿐이다. 어쨋거나 팔만장의 운반에는 수많은 조운선(漕運船)을 일시에 동원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실제로 그 외 다른 대안이 현실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규모 자체의 장대함과 더불어 역사적인 의미까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이름도 ‘장경(藏經)나루’ 또는 개경포(開經浦 경판을 내린 나루터)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의 행정명칭인 ‘개진’면은 일제강점기 때 개경포와 도진촌(渡津村)이 합해진 것이다.
 
어쨋거나 강이건 바다건 물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것에는 커다란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당연히 종교적인 힘에 의지하고자 했다. 985년(고려 성종 4년) 안전한 통행을 기원하면서 개포2리 마을 끝자락 산아래에는 지역의 장인이 돌로 정성껏 만든 석조관음보살좌상(경북 유형문화유산)이 뱃사람들의 안전을 천년이상 책임지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개경포 공원에도 그 모습을 본뜬 불상을 조성하여 낙동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다시 모셨다.
 
[합천 가야면]


하지만 모든 조건은 변해가기 마련이다. 근대화와 함께 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뚫리고 여러 개의 다리가 낙동강을 가로질러 만들어졌다. 따라서 나루터는 본래기능을 상실하면서 상인들이 떠나고 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져 마을을 비우게 되면서 차츰차츰 쇠락을 거듭하다가 서서히 모래밭과 갈대밭으로 바뀌어갔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개경포의 역사적 의미도 자연스럽게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지역유지들은 뜻을 모아 2001년 ‘개경포기념공원’을 조성하고서 각종 시설과 기념물을 세웠고 2014년에는 주막 한 채를 복원했다. 강둑너머 널따란 평야에 하얀 꽃이 핀 개진감자는 이 지역의 명산물이다. 개포주막의 감자전 메뉴의 식재료가 되어 지역 특산물을 알리도록 하는 역할을 맡겼다. ‘개경포’ 표지석 글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송월(淞月)스님의 솜씨로 남아있다. “명필은 백리 안에서 백년만에 한 명 날까말까 한다”는 말씀을 주변에 가끔 하실 만큼 당신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어른으로 기억한다.

 
[순례길 표지판]

 
개경포기념공원에는 팔만대장경 이운 순례길의 시작점을 알리는 안내판이 우뚝하게 서 있다. 현재의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신작로가 아니라 고령ㅡ성주ㅡ합천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옛길을 따라 이동했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개울을 건너고 고개길을 굽이굽이 넘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찻길을 이용하여 이동했다. 전체 이운로를 알리는 그림지도에는 외길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길을 상상하면서 여러개의 이동경로를 함께 그려놓았다. 결과적으로 걷는 사람이 형편따라 선택권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팔만대장경을 이운했던 순례길의 일부구간을 걸으면서 덕곡저수지(성주 수륜면) 아래 ‘성찰의 길’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성주군 수륜면과 합천 가야면의 경계지점에 세워놓은 이운행렬을 묘사한 부조 앞에서 짧으나마 순례길 걷기일정을 마무리했다.

 
알고보면 팔만대장경은 인쇄시설이다. 따라서 책으로 만들었을 때 그 가치가 더욱 살아난다. 1987년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우리나라 ‘책의 날’을 10월11일로 지정 선포했다. 팔만대장경이 완성된 1251년 음력 9월25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이다.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의 ‘책의 날’은 4월 23일이다. 8년이나 먼저 우리가 책의 날을 지정한 K출판문화의 저력도 알고보면 팔만대장경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팔만대장경 이운행렬 재현(개경포기념공원 자료사진)]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