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반도체 유치 사활 건 세계 각국 … 뒷짐 진 한국

2024-04-08 08:31

전운 산업부장 겸 시장경제에디터
반도체 업계에서는 “지금이 보조금 지급될 적기”라는 인식이 적잖다. 미국·일본·중국·인도·EU 등 반도체 경쟁국이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이 열풍에 편승해야 보조금 신설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세계 각국이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가며 투자에 나섰고, 이는 반도체 전쟁이 곧 국가 대항전이라는 말을 의미한다.
 
실제로 미국은 2022년 ‘반도체 지원법’ 제정 후 연방정부 차원에서 자국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 5년간 총 527억 달러(약 70조원)를 쏟아붓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선두 지위 탈환을 노리고 있는 인텔에 100억 달러(약 13조2900억원)를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개발·설계·생산’이라는 반도체 3대 핵심 요소 중 미국이 갖추지 못한 ‘생산’ 능력을 인텔을 통해 탈환하는 방안이다.
 
‘반도체 부활’을 꿈꾸는 일본도 대만과 연합 전선을 구축해 반도체 전쟁에 참전했다.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이라는 이름으로 반도체 관련 법을 제정한 데 이어 TSMC 제1공장 설비투자액의 절반에 가까운 최대 4760억엔(약 4조2000억원)의 보조금을 제공했고, 제2공장에는 약 7300억엔(약 6조5000억원)을 지원할 방침이다.
 
기업 자체 노력뿐 아니라 정부의 과감한 재정·제도 지원책이 반도체 시장의 분업질서 축을 바꾸고 있는 셈이다.
 
중국도 이미 전 세계 모든 반도체회사가 들어와 공장을 짓고 반도체를 생산했고, 실리콘 밸리의 핵심 반도체 엔지니어의 상당수가 중국계이다. 그리고 연간 1158만명의 대졸자 중 절반이 공대생이다. 미국 반도체보조금이 527억 달러이지만 중국은 이 규모의 2~3배 자금을 반도체 국산화에 지원할 계획이다. 지난해 중국 상장반도체 기업 190곳에 121억 위안의 정부 자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메모리 반도체 기업 세계 1위와 3위가 있는 강국이지만, 기업들은 국내에서 연일 푸대접을 받고 있다.
 
올해 반도체 관련 예산은 1조3000억원에 불과하다. 정부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 방안에 2047년까지 662조원을 투자한다고 했지만 기업의 투자액 합계이고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 지원’ 계획은 없다. 미국·중국·일본 등 주요 경쟁국이 수조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과 대비된다.
 
‘대기업 특혜’라는 야당의 반대로 직접적인 보조금 지급은 물 건너갔고, 투자비에 대한 15%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K칩스법’이 작년 3월에서야 통과됐다. 미국의 칩스법이 발효한 2022년 8월보다 반년 넘게 늦은 시점이었다. 4·10 총선을 앞두고 나온 공약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은 “반도체 투자세액공제 일몰기한(2024년 말) 추가 연장”을 언급했을 뿐이다.
 
이렇게도 우리 정부의 자세가 느긋하다 보니, ‘WTO 눈치설’까지도 새어 나온다.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의 눈치를 보며 보조금 지원에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경쟁 촉진을 위해 보조금 지원을 제한하고 있는 WTO가 추후 한국을 상대로 제소할 수 있다는 지나친 걱정 때문이다.
 
반도체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산업이다. 기업만이 나서 성장시켜야 할 것이 아니라, 범국가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 경쟁국이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고 있을 때, ‘HBM(고대역폭메모리)를 선점했다’ ‘바닥을 지나 업턴(상승국면)에 들어섰다’며 도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만약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국내 투자여건 악화를 들어 ‘굿바이 코리아’를 선언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가서도 ‘대기업 특혜’를 운운하며 그들을 비판할 것인가.
 
반도체 기업을 전폭적으로 돕는 건 세계 1, 3위의 반도체 기업을 지켜내는 동시에 반도체 강국, 나아가 미래 기술 강국으로 나가는 초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