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준의 함께꿈] 누구를 위한 정치이고 무엇을 위한 정치인가
2024-03-27 06:00
아주경제 4.10 총선 기획 (3)
내홍과 파동으로 요동친 총선 공천이 끝났다. 지역구의 후보가 세 번이나 바뀌는가 하면, 실세의 항의로 비례대표 순번이 다음날 바뀌었다. 심지어 후보 등록 마감이 지나고도 공천을 취소하고 정당의 지역구 후보가 사라졌다. 원칙도 기준도 애매한 공천의 결과로 과연 어느 당이 웃게 될까? 총선이 끝나면 이 땅에는 ‘정서적 분단’ 상태에서 ‘심리적 내전’이 종료되고 정치적 평화가 찾아올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먼저 공천을 간단하게 평가해보자. 정치초보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지휘한 집권당의 공천은 별다른 특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등판은 대통령 내외의 리스크 관리와 자신의 미래권력 창출이라는 두 개의 목표로 설정됐다. 내홍을 최대한 줄이면서 김건희 특검법이 저지되자마자 영남권 텃밭에서 시스템공천·혁신공천을 시도했지만, 선명한 기조와 비전 없는 공천은 참신하거나 특별한 느낌 없이 무미건조하게 끝났다. 그 사이에 상대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그의 특유의 어법과 제법 멋스러운 패션 스타일이 그를 평가하는 요소로 등장했다. 후진적인 정치문화의 단면에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
제1야당의 공천은 당내 주류 교체의 과정이었다. 소위 ‘개딸’의 지지를 업은 비주류 이재명 대표는 공천을 통해 유감없이 권력을 휘둘렀다. ‘비명횡사’는 권력의 비정함과 무상을 동시에 드러냈고, 정치적 생명력이 다한 586세대의 적잖은 정치인을 퇴출하는 역사적 순간을 연출했다. 586세대에 대한 한동훈의 비난이 이재명의 손으로 실현되는 아이러니였다. 과거의 정치적 약속은 무시하거나 궤변으로 감추고, 친명체제 구축에 온갖 힘을 쏟았다. 대선 패배의 방어막으로 손에 쥔 당권이 방탄국회를 통과해 다음 대선까지 그를 지켜줄지 궁금한 대목이다.
어느 쪽이 승리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국면에서 승패는 부차적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승리해도 대한민국 정치는 회생과 진화의 여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우울한 전망 때문이다.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찬 공천판에서 정치의 본령으로서 정책 대결은 완전히 사라졌다. 국내외에서 대한민국의 망조를 예견하는 경고음이 터져 나오지만, 초저출산과 인구감소, 지방소멸, 기후재앙 등 다양한 현안을 다룰 인재 확보는 공천과정에서 공론화되지 못했다. 나아가 웬만한 국민은 사과 한 알도 선뜻 장바구니에 담지 못할 만큼 물가가 치솟고 경기 침체로 청년 고용이 얼어붙어도 정치권은 상대를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누구를 위한 정치이고 무엇을 위한 정치인지 유권자들은 묻는다. 이대로 망해도 괜찮은가?
현 정부는 3대 개혁을 추진했다. 노동개혁, 교육개혁, 연금개혁이 그것이다.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적 갈등의 경감과 해소에 있다. 다음 국회에서도 다시 논의될 사안임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전문적인 소양과 사회적 갈등 해소를 위한 정치적 역량을 겸비한 국회의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양당이 연금개혁에 의지가 있다면, 비례대표 순번에 연금전문가를 배치하는 전략을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의 비례대표 30번 내에 연금전문가는 없다. 국민의힘의 경우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서 현 정부 초대 사회수석을 역임한 안상훈 교수가 있을 뿐이다. 연금개혁은 여야가 당위성을 논하는 정치사안이건만 양당이 전혀 준비하지 않는 상황을 보면 다음 국회에서도 기대하기 어렵다. 필자의 전망이 너무 비관적인가.
노동개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현 정부가 시도한 정책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노동개혁의 전망을 따져보면 역시 그리 밝지 않다. 노동개혁의 적임자들이 국회에서 민의를 수렴하고 정책을 개발하는 미래가 쉽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를 대비하는 전략이 부재한 정치가 국민의 삶을 편안하게 행복하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반면교사로서 독일의 사례를 보자. 1980년대 독일은 격변기를 맞았다. 폴란드의 자유노조 시위, 소련의 개혁과 개방 정책 등 80년 초중반부터 사회주의권이 요동쳤고, 불과 몇 년 뒤 1989년에 사회주의권 전체가 붕괴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미 1970년부터 사민당 정부가 통독의 길을 열었지만, 1982년 총선에서 보수적인 기민당 정권이 들어섰다. 그렇지만 헬무트 콜이 이끄는 기민당 정부는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했다. 콜의 내각은 디트리히 겐셔 같은 자민련의 노련한 외교가를 끌어안고 통일정책을 꾸준히 이어갔다. 물론 통일정책에는 외교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일사불란하게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노동정책의 일관성이 필자에게 눈에 띄었다. 노동정책이야말로 동독 국민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집권 초기부터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된 기민당 노동전문가 노베르트 블룸은 통일 이후에도 장관직을 수행함으로써 무려 16년간 콜 내각을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교육개혁 또한 마찬가지다. 교사가 배제된 교육개혁은 영원히 미제로 남는다. OECD 회원국 가운데 학생의 행복도는 꼴찌, 자살률은 단연 1위. 학생이 교사를 구타하는 교실, 교사가 민원 때문에 자살하는 나라. 늘봄으로 학부모의 부담을 덜겠다는 교육부의 발상에 교사들은 기겁한다. 문제의 근원을 방치한 채, 생색내기에 여념이 없는 교육부 당국의 행태에 절망이 고개를 든다. 그렇지만 교사들은 정치적 해결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 정치적 중립성의 원칙 아래 교사들의 피선거권은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 질곡을 풀지 못하는 한 교육개혁은 연목구어에 그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개혁과제를 해결하리라는 아무런 전망도 없는 국회에 우리는 무슨 기대를 걸까? 대통령 탄핵, 김건희 특검법의 재발의, 한동훈 딸의 전면 수사?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증오와 복수의 반복으로 그치면 희망은 없다. 새 국회는 국민의 삶과 국가의 안위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새 국회가 민의의 전당으로서 국회의 기능을 회복하는 새로운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우리 앞에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민족적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한반도 평화의 정착과 동아시아 전쟁 방지, 산업체제의 대전환에 대비하는 한국 기업을 위한 지원 전략, 사회적 불평등 해소와 빈곤계층의 지원 방안, 비수도권 지역의 공동화 현상과 그에 따른 인구유출 및 경제생활의 침체를 치유하는 획기적인 대책 등 그 어떤 사안도 하나같이 만만치 않다. 서로 비수 같은 독설을 날리고 험담하며 싸울 시간도 아니고 계제도 아니다. 아이들이 죽어가고, 노동자가 죽어가고, 대지가 죽어가고, 아이를 낳지 않고, 서로를 돌보지 않는 삭막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가 아니면 어디서도 해결할 수 없다. 이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능력도 자격도 국회가 아니면 없다. 따라서 대화하고 타협하는 국회로 전환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한다.
프랑스에서 연금개혁으로 몸살을 앓을 때,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에서 야당과 설전을 벌였다. 오바마가 이른바 오바마케어를 도입할 때, 그의 화려한 언변은 의원들과 토론에서 빛났다. 메르켈은 때로는 보수연정, 때로는 대연정을 통해 16년 동안 통일 독일을 이끌었다. 그 비결은 단연 국민을 위한 정치를 지향하며 야당과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정책 구현에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 정부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화를 거부한 정치가 미국 정치사에서 초유의 의회폭동 사태로 귀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로의 정책을 무조건 반대하며 몸싸움을 벌이는 동물국회, 보이콧을 일삼는 식물국회에 국민은 진절머리가 난다.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손실을 초래하는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야 합의로 국회선진화법을 제정한 이력이 있다. 대화와 타협은 결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22대 국회에서는 품위 있게 토론하는 민주주의의 전당을 볼 수 있기를 국민으로서 바란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