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준의 함께꿈] 정치 지도자들여, 이 나라가 만만합니까

2023-12-27 21:41

[안상준 교수]

 

 
대통령이 민심과 다투고 오기 정치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총선 승리에 집착하는 대통령의 파행적인 국정 운영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총선 승리를 위해 막무가내로 쏟아내는 기이한 대책과 기괴한 인사는 국민의 정신건강을 위협할 지경이다.
 
산업자원부 장관이 임기 시작 후 3개월 만에 총선 출마를 위해 물러났다. 장관 6명을 교체하는 소폭 개각을 단행한 지 불과 며칠 만이었다. 물러나는 장관은 모두 예외 없이 내년 총선에 출마한다. 언론은 “장관직이 국회의원으로 가는 스펙이냐”고 대통령 인사 스타일을 비판한다. 정부가 그런 비판을 귀담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하다는 증좌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내년 정부 예산에 대해 국회 심의 과정을 책임지는 기획재정부 장관도 개각 명단에 포함돼 있다. 정상적인 국정 운영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보이고, 대통령의 권력 놀이에 동원되어 영혼 없이 처신하는 장차관들 모습에는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으로 비판한 히틀러의 하수인들이 어른거린다.
 
부산 엑스포 유치 경쟁은 국제적인 망신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정부의 오판과 무모함, 그에 따른 예산의 낭비, 희망 없는 게임에 들러리 서는 재벌의 모습 그 모두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였다. 그 와중에도 대통령 부부의 잦은 해외 순방은 국가적인 외교 행사인지 가족 해외여행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숱한 논란을 낳았다. 엑스포 유치 실패는 자명한 결과였고, 정부의 무능과 파렴치는 국민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다. 매우 이례적으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이 발표되었다. 이제는 대통령의 국정 운영 기조가 바뀌고 타협의 정치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가능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국민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참으로 기괴한 장면에 말문이 막혔다. 대국민 사과 며칠 뒤 대통령은 부산 깡통시장에서 유력 재벌 총수들을 병풍처럼 세워 놓고 떡볶이 먹방쇼를 벌였다. 부산의 총선 민심을 잡기 위해 체면과 격조 따위는 집어던진 천박한 퍼포먼스였다. 이 장면은 재벌의 약점을 이용한 대통령의 견리망의(이익을 보고 의로움을 잊는다)가 최고조에 달한 역대급의 기괴한 연출이었다. 이에 대국민 사과의 진정성은 증발했고, 엑스포 유치를 위한 재벌 총수들의 민간 외교는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의 특수한 관계를 증명했다.
 
재벌의 저승사자였던 특수부 검사 출신 대통령에게 재벌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보였나 보다. 물론 재벌들은 찰나의 부끄러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물질적 대가를 보장받았을지도 모른다. 개발독재의 수혜자로 성장하여 지속적인 정경유착으로 유지되는 재벌의 지위를 삼척동자라고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국민의 눈높이에서 볼 때 국정 책임자로서 대통령이 벌인 품위도 망각하고 국제사회에서 재벌 총수의 지위도 배려하지 않는 길거리 쇼에 국민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쯤 되면 재벌에 유리한 감세 정책도 국가 경제를 고려한 조치라기보다는 재벌을 동원하기 위한 족쇄가 아닌지 심히 의구스럽다.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 그저 숨죽이고 있을 재벌의 처지를 생각하니 갑자기 재벌들이 처량하고 불쌍하게 여겨진다. 세상 참 요지경이다.
 
방송 장악에 대한 대통령의 집착은 더욱 두드러진다. 온갖 비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송통신위원장에 기용됐던 이동관은 과속 질주해 법을 위반했다. 자신과 대통령이 지명한 다른 상임위원 단둘이 회의를 열어 취임 이후 모두 29개 안건을 의결함으로써 그는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합의제 행정기구’로서 방송통신위원회 설립 취지를 위배했다. 그러고도 전혀 거리낌 없이 당당했다. 의결 안건 중에는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교육방송(EBS) 이사 교체도 있어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그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읽혔다. 다행히 야당은 탄핵 카드로 이동관의 질주를 멈춰 세웠다.
 
이동관의 사퇴는 대통령에게 적잖은 상처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대통령은 다시 검사를 소환했다. 검찰 선배로서 몇 달 전 국민권익위원장에 임명된 ‘형님 김홍일’을 이동관의 후임으로 내정한 것이다. 검사는 모든 분야의 전문가임을 추인이라도 하듯이 방송 장악에 동원된 특수부 검사의 임무가 과연 성공적으로 완수될지 지켜볼 일이다.
 
여당 대표 김기현의 사퇴 과정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다. 그는 용산의 여의도출장소라는 집권당을 향한 비아냥을 들어도 오로지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던 당대표였다. 대통령에 의해서 그리고 대통령을 위해서 당대표직을 수행했건만 자신의 지역구를 지키려는 국회의원의 ‘소박한 소망’을 품은 탓에 그는 대통령의 격노를 자아냈고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는 민주주의니 공당이니 어떤 정치적 개념과 행위의 적합성을 따지기 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모멸적인 토사구팽이다.
 
드디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한국 정치의 심장부로 불려 나왔다. 이제 여당의 실권은 검사 3인방 윤석열·김홍일·한동훈 수중에 떨어졌다. 많은 평론가가 예상하던 대로 서서히 검사왕국의 전모가 드러났다. 법에 근거한 정치로서 법치가 아닌 엘리트 법조인이 법을 앞세워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법치가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검사동일체를 기초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일단 의심이 들면 끝까지 파서 유죄를 창조해내는 법기술자들의 칼날이 세상을 휘저을 태세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라는 국민의 명령을 무시하고 사조직을 만들어 권력을 창출하고 시민권을 억압하던 군부의 총칼과 무엇이 다른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권력 놀이에 흠뻑 취한 대통령과 여당의 막장 드라마를 지켜보는 국민의 시름은 점점 깊어만 간다. 거대 야당의 삼류 드라마도 막장 드라마 못지않게 한심한 탓이다. 전직 민주당 대표를 지낸 인사는 연일 신당 창당 카드로 당대표 흔들기에 여념이 없고, 다른 한편에서는 당대표와 각을 세운 세력이 당대표의 이선 퇴진을 주장한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는 최대 의석을 확보한 제1야당 민주당이 결정권을 갖는다. 그러나 민주당은 현재 방안에 갇힌 코끼리처럼 옴짝달싹 못하고 쩔쩔맨다. 그저 정부의 실정에 기대어 반사이익만 노리고 정작 혁신과 비전은 보여주지 못한다. 근원적인 원인은 대표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와 리더십 실종에 있다.
 
사실 이재명 대표는 장기간에 걸친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성토하며 억울한 처지를 항변할 수 있다. 많은 국민은 그의 심경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인간적인 차원과 별개로, 국민은 각자의 삶에 선한 영향을 미치는 야당 대표를 원한다. 이재명 대표는 현명한 선택으로 이 국면을 빠져나와야 한다. 그가 야당 대표로서 윤석열 검찰을 만난 것도 정치적 운명이자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대선 이후 그는 엉뚱한 지역구를 물려받아 국회의원이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민주당 대표가 되었다. 물론 민주당 당원의 선택이기도 했다.
 
이재명에게 당대표직은 검찰의 칼날을 막는 방패막이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서 민주당은 방안에 갇힌 코끼리가 되었다. 민생을 위한 민주당의 노력은 그만큼 국민적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고 대통령의 폭주를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어렵다. 혹자는 민주당이 오히려 국민의힘보다 총선 승리를 위한 혁신 경쟁에서 뒤처진다고 평가하고, 혹자는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 노쇠한 정당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사이다’ 이재명은 사라졌다. 지방정부의 행정가 이재명의 명성은 정치가 이재명의 원대한 비전과 실효적인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재명 대표는 침묵하며 장고 중이다. 그는 조만간 선거제 개혁안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선택의 결과는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미래와 직결될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이 대표는 대선 공약으로 ‘병립형 비례대표제’와 위성정당 폐기를 내세웠다. 정치개혁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주도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공약 폐기를 내비쳐 퇴행에 동참한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를 즐기는 양당 체제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이제 국민은 똑바로 보고 있다. ‘멋진 패배’를 버리고 ‘초라한 승리’를 누릴 때 정치인 이재명이 건재할지 두고 볼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각자도생은 국민의 삶을 휘감는다. 삶의 가치는 돈으로 치환되고, 인간은 돈으로 평가된다. 공동체는 해체 중이고 관계는 점점이 흩어진다. 누가 나라를 지키고, 누가 아이를 낳고, 누가 소를 키울지 모르겠다. 인구 소멸, 지방 소멸, 대학 소멸 등 대한민국이 소멸의 늪에 빠져든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지 못해 분노가 서린 대통령의 얼굴에서, 억울한 심경을 가누지 못해 저주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이재명의 얼굴에서 국민은 정치 지도자의 대의를 느끼지 못한다. 대의를 좇지 않는 정치인이 나라를 이끌 때 국민의 삶은 질곡에 빠진다. 도덕이 땅이 떨어지고 인명이 사소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공자님은 “자신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말을 실천하는 것도 어렵다.”(논어 현문편, 14.20)고 말씀하셨다. 이 땅의 정치 지도자가 부끄러움을 깨닫고 대의를 좇아 나라를 바로 세우기를 세모에 기원한다.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