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11) 얼음 녹듯 사라질 권세에 기대려는가 - 빙산난고(氷山難靠)
2024-03-11 17:16
바야흐로 총선의 계절이다.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하는 공천 정국이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한동안 친윤이니 비윤이니 하면서 으르렁대던 국민의힘은 한동훈 비대위원장 등판 이후 잠잠해진 반면 요즘 뉴스의 초점은 단연 민주당이다.
친명과 비명.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요즘 티브이를 틀기만 하면 귓가에 꽂히는 단어들이다. 이재명 대표와 친하면(親明) 웬만한 결격사유가 있어도 공천을 받고, 친하지 않으면(非明)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낙천시킨다 해서 급기야 '친명횡재, 비명횡사'란 절묘한 대구(對句)까지 등장했다. 이쯤되면 공천이 아니라 사천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이재명 대표는 펄쩍 뛰며 "시스템 공천"이라고 주장한다.) 친명 세력은 사당화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골적인 비명 제거에 거침이 없다. 속절없이 본선에 오르지도 못할 위기에 처한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공천을 둘러싼 파열음은 필연적이다. 공개 반발과 탈당이 줄을 잇는다.
그렇다고 국민의힘 공천이라고 멋져보이진 않는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변화와 감동, 쇄신이 없는 '3무 공천', '용각산 공천'이라는 조롱을 들을 정도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조용한 게 감동"이라고 반박했다.) 이런 국민의힘 역시 공천 작업이 막바지로 갈수록 친윤불패론이 힘을 얻자 당 안팎이 뒤숭숭하다. 여야를 막론하고 도를 넘는 공천 잡음에 국민들의 피로감만 날로 커진다.
유력 정치인 X와 친하다고 해서 통칭되는 '친(親)X'는 이제 국민 일상어가 되다시피 했다. 우리나라에서 멸칭으로 간주되는 '친일파' 이후로 '친(親)'이란 한자어가 이렇게 핫한 단어가 된 건 순전히 갈수록 퇴행하는 후진적 한국정치 탓이다. 유력 정치인과 친하다는 것은 그를 추종한다는 의미로 통한다. '추종'은 동등한 관계에서 쓰이는 말이 아니다. '친X'라 함은 X의 권세에 기대어 살겠다고 천명한 것과 다름없다.
추구하는 가치나 이념이 아니라 권세를 좇아 파벌을 짓고 노선을 달리하는 행태를 정치 선진국에서 들어본 적이 없다. 국회의원을 왜 '선량(選良)'이라고 불러주는가? 가려 뽑힌 뛰어난 인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오로지 나라를 위해 역량을 발휘하라는 주문이다. 선량이 되겠다는 인사들이 '친X'임을 자처하며 공천에 목을 매는 낯뜨거운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건 고역이다.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친X'의 효시는 '친노'가 아닌가 싶다. 노무현을 추종하던 친노는 문재인을 추종하는 '친문'으로 분화되었고, 권세를 누리던 친문이 지금은 비주류가 되어 당 대표 이재명을 추종하는 '친명'으로부터 온갖 설움과 박해를 받고 있다. 보수 쪽도 별반 다르지 않다. 노무현 정권을 퇴장시킨 이명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형성된 '친이'가 좋은 세월 누리는가 싶더니 박근혜를 추종하는 '친박'과 치열한 당내 투쟁을 벌였고, 정권 말기에 이르자 패권은 친박으로 넘어갔다. 박근혜 정권이 출범하자 친박 간에 찐박 논쟁이 벌어지면서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다. 윤석열 정권 출범과 함께 인구에 회자되던 '친윤'은 대통령 지지율이 약세를 면치 못하자 채 2년도 못가 존재감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북송의 사마광이 편찬한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사마천의 '사기'에 비견된다. 흔히 제왕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자치통감에는 수신과 제가, 치국평천하에 대한 교훈이 가득하고 수록된 예화들은 우리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자치통감 당기(唐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당나라 현종이 며느리 양옥환(楊玉環)을 특별히 총애하여 귀비(貴妃)에 봉하였으니 바로 양귀비다. '계견승천(鷄犬昇天)'이라고 했다. 한 사람이 득세하면 모든 친척·친구 및 아는 사람들, 심지어 집에서 기르는 닭과 개 조차도 덕을 보게 마련이니 양씨 집안이 살판났다. 특히 그녀의 사촌오빠였던 양국충(楊國忠)은 현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최고위 관직인 재상이 된 후에는 전권을 손아귀에 쥐고 조정의 관리를 제 마음대로 임명할 정도였다. 권세에 빌붙는 무리들은 늘 있는지라 시쳇말로 '친양親楊'이 생겨났음은 불문가지다.
당시 재능은 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해 관직에 나서지 못한 장단(張彖)이라는 샨시(陝西,섬서)성 출신 진사(進士)가 있었다. 친구들이 그에게 양국충을 찾아가 청탁을 하면 금새 관직을 얻을수 있으니 그리 해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장단은 그들에게 "자네들은 모두 양국충을 태산처럼 든든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는 한 덩이의 빙산에 지나지 않는다네. 장차 천하에 변고(變故)가 있게 된다면 그 즉시 태양에 얼음이 녹듯 무너지고 말걸세"라고 말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안록산이 난을 일으켜 수도 장안을 함락시켰다. 양귀비와 양국충은 현종과 함께 쓰촨으로 도망가던 중 마외역(馬嵬驛)이란 곳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태산이 무너진 것이다. 양국충의 몰락과 더불어 '친양親楊'들의 처지도 하루아침에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예화는 권세의 무상함과 '빙산난고(氷山難靠)'라는 성어를 후대에 전하고 있다. 빙산은 기온이 높으면 바로 녹아 버리므로 오래도록 의지 못할 부귀・권세・사람・배경 등을 비유한다. 따라서 빙산난고(氷山難靠)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권세는 오래 가지 못함을 뜻한다. 얼음산의 경계, 즉 빙산지계(氷山之戒)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지켜보는 국민들은 다 안다. 친X니 뭐니 하면서 권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저 좋은 세월이 길어야 5년임을.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5년 단임제니까. 레임덕이라도 오면 그 기간은 더욱 짧아진다. 거대 야당을 이끄는 당 대표의 권한이 크다 한들 또 얼마나 오래 갈까. 이 단순한 이치를 정작 정치인들만 모르는 것 같다. 여산에 들어가 있으면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듯이 정치판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빙산이 만고불변 태산처럼 보이는가 보다. 태양빛에 속절없이 녹아 없어질 얼음산이거늘.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