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 …'나와 너' 그리고 소통

2024-02-29 06:00

[이두수 작가]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나와 팀원 관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것은 일당이 많고 적음을 넘어 팀원간의 역할분담과 서로의 협조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일을 같이 할 수 없거니와 일에 대한 보람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자와 회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노동에 대한 가치문제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긴 하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들, 즉 ‘나와 너의 관계’는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노사문제나 노노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의 성과나 현장의 안전문제까지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주제다.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불거진 손흥민과 이강인의 갈등에서 벌어진 팀워크의 문제도 결국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벌어진 문제다. 손흥민은 아버지의 독한 훈련을 잘 버텨낸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이강인은 어릴 때부터 축구신동으로 자유롭게 자기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듣고 있다. 이런 성장배경과 기질의 차이가 있음에도 한 팀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축구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적인 문제와도 연결된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우리 사회는 나와 너, 혹은 내편 니편으로 갈리면서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갈등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런 것은 인식의 방식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말의 ‘알다’라는 말은 알에서 왔다고 본다. 새의 알처럼 알은 전체를 포용한 말이다. 알맹이, 알몸, 알통 같은 말을 보면 알은 사물의 핵심과 진수, 알짜배기를 일컫는 말들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대상의 핵심에 접근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한 부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두루두루 아는 박식한 지식이 우리 말의 앎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모르는 것이 없다.
반면에 일본어로 알다는 와카루 分かる다. 와카루는 나누는 것이다. 한자어로도 이해 理解、분석 分析 이런 말을 보면 동양권에서도 앎은 분해하는 과정이다. 서양의 근대과학은 사물을 잘게 쪼개어 분석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물질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까지 쪼갠 그 단위를 원자(Atom)라 불렀다. 인간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를 인디비듀얼 Individual이라 했고 이를 개인 個人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동양에선 이렇게 분절화된 개인보다는 인간 人間, 즉 사람人 사이間의 관계에 더 주목했던 거 같다.


주체와 대상

이 세상을 크게 나누어 본다면 나는 주체와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세상은 나와 연결된 관계구조다. 물론 주체가 항상 나일 수는 없지만 한 문장이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 것처럼 이 세상도 크게 보면 나와 너라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상에서 ‘알다’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말이 ‘우리’다. 우리는 ‘나’와 ‘너’라는 개념을 알기 전에 ‘우리’라는 말을 먼저 사용했던 거 같다. 우리 속에 ‘나’와 ‘너’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우리라는 말을 써왔던 거 같다. 우리라는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나’와 ‘너’에 대해 먼저 살펴야 한다.
우리라는 말 속에는 나와 너가 있다. 나와 너의 관계성이 바로 우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성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말한다.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가 상호 모순적이냐 아니면 상호 보완적 관계로 보느냐에 따라 주체와 대상은 원수관계가 될 수도 있고 파트너의 관계가 될 수 있다. 모순적 관계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적으로 보는 것이다. 적은 쓰러뜨려야 하고 제거해야 하는 상대다. 그래서 싸움을 벌여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탄생이 온갖 바이러스와의 싸움이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1등을 놓고 경쟁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최고가 되기 위한 투쟁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삶은 원래부터 고통이고 전쟁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상호 보완적 관계라고 한다면 상대는 나를 도와주거나 보완해주는 관계이므로 나에게 필요한 존재다. 상대를 파트너로 보는 것은 너와 내가 전체를 이루는 한 구성원이라는 의식이다. 현장에서 기계를 사용하다 보면 고장이 난다. 고장의 원인은 대개 작은 부속품, 볼트가 빠지거나 퓨즈가 끊어지거나 하는 등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일어난다. 아무리 작아도 그 한 부품이 없거나 망가지면 기계는 작동을 멈춘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한 부분 한 부분의 파트너가 귀한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는 가족관계에서 그 모델을 볼 수 있다. 가족간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고 때로는 상대를 위해 희생도 한다. 특히 부모와 자식관계에서는 모든 조건을 초월하기도 한다. 부자관계만이 아니라 남녀간의 관계도 상식과 논리를 초월하기도 하고, 어떤 이념이나 가치, 우정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는 비상함도 나타난다.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보면, 꽃나무와 바람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바람과 꽃나무의 관계를 보자. 꽃나무에게는 바람이 필요한 것이다. 흔들리는 나무는 살아있음이다. 죽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에 나무가 쓰러지고 가지가 찢긴다 해도 나무에겐 바람이 필요하다. 태풍이 피해를 준다고 없앨 수는 없다, 태풍이 불어야 자연은 그만큼 더 건강해지고 다양해지는 것이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와 꽃, 아니면 그 어떤 대상이 나와 이런 사이라면 그와 나는 원수가 될 수 없다. 그가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체와 대상은 그런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그렇게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상대를 까부수고 제거해야 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주체와 대상이 이렇게 서로를 높여주고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 새로운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는 목적이 같아야 한다. 공유할 비전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개혁신당의 파국은 정당의 뜻과 이념의 정체성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비례대표 의석이라도 잡아보려는 꼼수에 불과해 결국 파행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No players is bigger than the club”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이 말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잉글랜드 리그를 최고 자리에 올려놓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말이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은 한 선수의 기량이나 인기가 아니라 팀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성이다. 이러한 팀 비전에 구성원들이 하나가 될 때 강한 힘이 나오는 것이다.


수수작용과 소통

건설현장엔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 TBM이라는 시간을 갖는다. 툴박스 미팅 Tool Box Meeting의 약자로 공정별로 하는 미팅시간이다. 조회시간에 전체가 공유해야 할 현장소장의 훈시를 듣기는 하지만, 티비엠 시간엔 팀장(예전엔 십장이라 했음) 중심으로 당일 할 일에 대한 실무적인 내용을 가지고 간단히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다. 어제 한 일은 잘 진행되었는지 체크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데 불안전 요인이 무엇인지 간단히 확인하는 시간이다. 이런 소통의 시간이 비록 짧지만 필요하다. 늘 하던 일도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최근 건설현장의 사고도 초심자보다 오래된 숙련노동자들의 사고가 더 많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어도 건설현장에서 인명사고는 줄지 않았다. 법으로 규제한다고 안전사고가 줄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 어떤 관계로 일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회사가 나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일을 시킨다는 소외의식이나,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내 일을 빼앗겼다는 적대의식으로는 건설 현장에서 신뢰분위기를 쌓을 수 없다.
<나와 너>라는 책을 쓴 마르틴 부버의 책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원인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가 깨진 데 있다고 보았다. 나와 너의 대화를 통해 상호관계를 이루는 것이 나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며 자아실현의 필수적 과정이라 했다. 이러한 바람직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시각이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고 상대를 이질적인 대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를 나보다 못한 존재로 보거나 나의 지배대상 혹은 소유대상으로 삼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나와 너를 물과 불처럼 대립적인 존재라고 속단하는 태도가 나와 너를 가로막는 분계선이 된다. 각자는 상대방에 속하지 않는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고, 너와 나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상호관계가 시작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사람, 너를 보는 시각

상대를 나의 생각과 나의 목표에 종속시키려는 욕심, 즉 인위를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연한 물처럼 인애심을 바탕으로 상대의 고유한 기질, 성품, 재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원한마저 덕으로 갚으려는 넉넉한 생각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자연스러운 길이다라고 노자는 말했다.
이런 시각에서 사람인人이라는 한자를 다시 써보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선을 긋고 그 밑에 선을 받치듯이 짧은 선을 그어 이것이 ‘사람人’이다 라고 표명한다.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한 사람을 그렇게 강해 보이지도 않는 또 다른 사람이 힘겹게 지탱해주는 형상이다. 이것이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仁이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면서도 쓰러지는 사람의 인생을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두 번째(二) 사람의 마음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공자는 仁이란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어진 마음”이라 개념 짓고 인의 행함은 한 인간이 지닌 개성을 최대한 선하게 성장시키는 일이며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생활방식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을 죽여야 인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인 나와 너가 가져야 할 덕목인 것이다.


 
그림 설명: TBM시간에 우리 팀장이 늘 강조하는 말씀은 “오늘 일은 오늘 마감되도록 꼼꼼하게 마무리 잘 하고 철저하게 확인하시오.” 꼼꼼하게, 잘, 철저하게…이렇게 일하기는 쉽지 않다.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힘들지 않은 것은 서로의 신뢰관계 때문이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