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인생이란 문장의 주어는 나
2024-01-26 09:08
진주어와 가주어 그리고 의미상의 주어
우리말에는 없지만 영어를 공부하다 보면 진주어, 가주어라는 말이 나오고 의미상의 주어라는 말이 나온다. 주어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은 주어를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말을 한참 듣다가도 그게 누구 말인데? 하고 물어볼 때가 있다. 내 얘기도 아니고 네 얘기도 아닌 그냥 ‘우리’로 퉁 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언어적 습관 때문인지 행위의 주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으며 여기서 책임 소재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책임지고 싶지 않을 때 주어를 흐린다. ‘~카더라’ 하는 것은 말을 전하는 사람들은 주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다.
선거철과 표현
요즘 4월에 있을 총선거 준비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여러 모임을 만들어 사람들을 모으고 길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사람들을 모아 본인 소개를 잘할 수 있는 모임이 출판기념회다. 그래서 그런지 내 주변에도 출판기념회가 여럿 있었다.
평소에 글도 써보고 책을 내 보며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표현해 왔으면 책을 받는 기쁨도 있겠지만, 대부분 후보자들의 출판기념회에서 받아보는 책은 출판기획사가 같은 곳인지 책 내용과 구성이 비슷해 책을 대하는 기분은 그리 좋지 못하다. 책 저자에 대해 신뢰감이 가지 않는데 왜 자꾸 이런 출판기념회를 하는지 모르겠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저자의 강압구조인 이런 출판기념회는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삶은 표현의 과정이다. 나는 ‘표현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한자로 써보면 表現, 겉으로 드러내다. 영어의 expression도 밖으로 드러내 놓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성격이나 성질, 즉 자기 생각과 비전, 뜻, 꿈, 야망 이런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 표현 수단이나 방법에는 글이나 말, 그림, 음악, 행위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은 창조와 같은 말일 것이다.
나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사람이 왜 사는가를 생각해 보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살아보려 몸부림치는 것이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부하고, 일하고, 고민하고, 싸우고 하는 내용들이 이타적 삶이든, 자기 중심적인 삶이든 내가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어 살아보려는 발버둥이며 이것이 삶이며 그 축적이 역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삶을 글로 표현해 본다면 한 문장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나는 ○○한다’ 혹은 ‘나는 ○○했다’처럼 ‘나’는 문장의 주어가 되고 ‘○○했다’가 동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란 의미는 결국 나라는 주어가 무엇을 어떻게 나타낸다고 하는 동사적 표현이다.
문장의 기본 구조는 주어와 술어다. 주어란 서술어가 나타내는 행위나 상태의 주체가 되는 문장 성분을 말한다. 문장은 아무리 간단하여도 주어 하나와 서술어 하나를 갖추어야 함을 원칙으로 한다. 복잡한 문장이라 하더라도 주어-술어라는 틀을 기본으로 하여 확대되어 가므로 주어는 서술어와 함께 문장의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장 성분이다.
물론 주어는 인간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동작이나 상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거나 사물이 될 수 있으며 때로는 한 문장 자체가 주어가 될 수도 있다.
문장에서 주어는 술어의 행위나 상태의 주체가 되는 명사를 말하고, 술어의 행위, 동작, 인식을 나타내는 것을 동사라 하고, 상태를 나타내는 말을 형용사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형용사는 동작의 의미를 전제로 하는 명령이나 청유형으로 활용하지 못한다.
주어는 술어가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술어와 매칭되지 않는 주어는 가짜 주어다. 주어의 의지는 술어로 나타난다. 주어는 어떤 동사를 쓰느냐에 따라 자신의 역량과 의지와 뜻을 피력할 수 있다. 간혹 형용사를 동사처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주어의 의미나 의지가 희석된다.
‘젊다'와 ‘늙다’를 예를 들어보자. 젊다는 한 시기의 상태를 의미하므로 형용사다. 그러나 늙다는 과정이 내포되어 있어 동사다. '젊는다'는 말이 안 되지만 '늙는다'는 말이 된다. 행복하다는 형용사다. 아주 기쁘고 좋은 상태를 말한다. '행복하세요'는 원래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건강하다'도 몸이 좋고 힘이 넘치는 상태를 말한다. '건강해라'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아름답다'의 '아름다우세요'는 아름답다는 감탄의 뜻이지 '아름다우라'고 명령하거나 권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고 참 건강하세요!'는 감탄의 말로는 쓸 수 있지만 '건강하라'고 권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행복해라'고 명령할 수 없는데 우린 언제부터인가 이런 식의 말을 자주 한다. 행복하자! 건강하자! 이런 말을 쓰는 것은 구호에 익숙하기 때문 아닐까. 아주 이상적인 상태를 설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라고 막 명령하는 거 같은 느낌에서 충돌이 생기는 것이다. 행동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하는 주어의 그 의도나 의지가 강압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명령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행되지 않는다. 문장 자체가 틀렸고 현실에서도 그렇다. 반복해서 이런 잘못된 지시나 명령을 내리면 주어의 권위가 형편없이 실추된다. 이는 곧 주어가 가주어나 의미상의 주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인의 역사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이 주인이 된 시대는 그리 길지 않다. 오랫동안 인류 역사라는 문장의 주어는 인간이 아닌 신이었다. 이를 신본주의 시대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 동물이나 식물 또는 산이나 바다, 하늘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신의 영광 혹은 신의 섭리를 위해 존재할 때 존재 의미가 있었다. 이런 시대가 꽤 길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지적 역량의 축적과 확대 덕분인지 모르지만 인간의 생각, 인간적 표현이 신을 대신하게 되었고 우선시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의 시점을 대개 서구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시기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주어가 되었다고 해서 신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주어적 가치는 신이 부여한 인권이라는 천부인권에서 힘을 받는다. 시천주-사인여천-인내천이라는 동학의 가르침도 이런 궤를 같이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너와 나의 가치를 이렇게 우주적 가치로 존귀하게 여기며 이웃을 평등하게 대하는 사상은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이런 사상적·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경제와 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세상은 역사상 유례없는 성장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에서 한국은 정말 전례가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사이에 모순과 갈등 또한 엄청나게 겪고 있다.
내가 주인이 되어야
우리 말에는 주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좋다”라고 말할 때 누가 좋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내가 좋은 건지, 네가 좋은 건지 아니면 우리가 좋은 건지 불분명하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실력보다는 상황 파악을 잘해야 출세한다.
보통은 화자의 중심은 내가 된다. 내가 주어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우리’로 대치한다. 사적인 부분도 나 대신 우리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공동 의지나 공동체 의식이 강한 것도 아니다. 내가 생략된 우리는 결국 나의 위치, 나의 지분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과 분열의 소지만 만들 뿐이다.
주어가 술어의 행위나 상태의 주체가 된다고 하는 것은 주어는 주어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어인 동사에도 집중해야 한다. 결국 동사에 의해 주어가 빛나기 때문이다. 동사에 주어의 의지와 의도가 나타난다. 본인은 행동하지 않고 남이 해 놓은 것을 인용하는 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결과된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것은 형용사가 될 뿐이다. 주어에 적합한 동사를 쓸 때 문장이 힘을 얻는 것처럼 주체들은 자기만의 행동규칙이 있어야 한다. 자기의 정책과 디자인이 없으면 행동할 수 없고, 그런 행위가 없으니까 남의 것을 베끼고 남의 말꼬리나 잡고 시간만 때운다.
그것은 나만의 고유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주어로서의 확신이 없으니까 자꾸 남과 비교하고 남을 흉내 내려고만 한다. 그러니 사회가 다양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자기 의견이 확실하지 못하니까 힘 있는 쪽에 붙어 진영화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렇다.
최근에 읽은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운명이란 것은 국지적 모래폭풍 같은 거지. 그 폭풍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지만 그럴 때마다 폭풍도 너를 따라 방향을 바꾸지. 폭풍은 바로 너 자신이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래가 귀나 눈에 들어가지 않게 꽉 틀어 막고 그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폭풍이 올 줄 알면서 그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열다섯 살 소년의 '터프함'이야.”
또 이런 말도 있다.
“비극이란 운명에 발버둥치지만 결국 굴복 당하지. 인간은 그 결과를 알면서도 발버둥치는 거야. 발버둥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시 발버둥을 치는 거지. 인간의 존엄은 그런 부자유함에서 나온다. 인간의 존귀함은 발버둥치며 자신의 자유를 개척하고 탐색하는 데서 나오지. 그 개척과 탐색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 인간은 부자유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할 때 존엄과 존귀함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안티고네' 같은 그리스 비극이 제시하는 인간의 정의다. 그리고 이런 인간적 태도의 가장 핵심적 관념은 바로 책임이다.”(영원한 소년의 정신 하루키 읽는 법/ 양자오 저)
세상은 표현하는 자가 주인이다.
세계는 권력자의 것일지 몰라도 삶만큼은 상상하고 읽고 쓰고 말하는 개인들의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문장의 주어는 내가 되는 것이다. 심오한 철학이 설명하는 세계나 신심 어린 종교가 말하는 이상 세계에 대한 추상적 언어를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언어로 번역할 수 없다면 그는 자기 삶에 주어가 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나 추상적 언어가 현실에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구체적 자기 언어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만의 표현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 비전이 이상적이고 아름답게 포장되었다 할지라도 내 삶에서 구체화할 수 없다면 그건 허상에 불과하다.
서양의 근대는 프랑스혁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상파 그림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 상호작용이 인상파 그림에서부터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동일하게 경험하는 세상을 화폭에 똑같이 재현하려던 이전 시대의 그림에 비해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의 순간적 내면의 경험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는 것이다. 재현(reprersentation)에서 표현(expression)의 시대로 변한 것이다.
나의 느낌,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해보자. 인류 문명은 그렇게 해서 변화·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이며, 삶이라는 문장의 주어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