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흔든 이재용 판결] 계열사 합병 추진땐, 합병비율 산정·사후 주가관리 모두 충족시켜야

2024-02-22 05:00
삼성물산-제일모직 주가조가 무죄...기업 미래가치 반영된 합병비율 '적정'
셀트리온·KG 등 경영승계 진행하는 가운데 회사·주주 피해 없어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1심 판결에서 유·무죄를 가르는 핵심 쟁점 중에는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비율 적정성이 있었다.

재판부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앞서 삼성 측이 이 회장에 유리하도록 주가조작을 했다는 검사 측의 주장을 부정했다. 각 회사의 미래가치를 둔 시장의 판단을 근거로 적정한 합병비율이라는 판단이다. 특히 재판부는 합병 후 양사의 동반성장 효과가 주주와 회사에 이익으로 이어진 점을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이 같은 사후처리가 이 회장을 배임 등 혐의로부터 자유롭게 했다는 것이 법조계의 분석이다. 

국내에서는 셀트리온그룹, KG그룹 등이 지배구조 개편을 통한 경영승계를 진행 중이다. 법조계에서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비율에 있어 시장의 판단과 합리적인 미래가치 제시, 합병 후 실질적인 주주 이익 등이 이 회장의 무죄 판단의 근거로 사용된 만큼 이번 판결이 이들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한다. 
 
◆ 주가조작 무죄 판단 재판부..."기업가치는 미래가치가 더 중요"
 
21일 이 회장의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 1심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앞서 삼성그룹이 두 회사의 주가를 고의로 조작했다는 검사의 주장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두 회사의 합병비율은 제일모직 1 대 삼성물산 0.35로 결정됐는데, 검사 측은 2014년 기준 삼성물산은 제일모직보다 자산총계가 3.1배, 매출액은 5.6배나 큰 기업임에도 합병비율이 이 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선정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검사 측은 합병 전인 2014년 12월 제일모직의 시가총액이 총자산의 2.3배를 넘은 부분에 대해 삼성이 고의적으로 과하게 고평가되도록 만들었다고 봤다.
 
하지만 재판부는 제일모직을 성장주로 보고 미래의 성장성과 기업가치를 평가하여 가치가 산정되는 만큼 주가순자산비율(PER)만으로 기업을 평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순자산가가 기업가치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기업가치는 미래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취지의 KB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의 진술을 언급했다.
 
재판부는 또 JP모건, 맥쿼리 증권 등 외국계 투자자를 비롯한 국내 증권사들이 하나같이 제일모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지배구조 개편을 통한 높은 이익성장률에 대한 시장의 컨센서스가 형성된 만큼 의도적 고평가라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삼성물산 기업가치를 의도적으로 낮췄다는 주장은 당시 국제유가 하락으로 국내 건설사 전반이 어려웠던 점, 이에 따라 물산의 영업이익이 2014년 1분기 대비 2015년 1분기 74.35%가 감소했으며, 2015년 4분기부터는 3조원에 달하는 손실이 기업가치에 계상됐다는 점 등을 들어 인정하지 않았다.
 
삼성은 지배구조 개편을 위해 제일모직 상장을 선행했는데, 그 결과 합병까지 시장으로부터 기업가치 판단을 받게 됐으며, 이 같은 데이터가 쌓여 법원에서도 정당한 합병비율을 주장할 수 있었다.
 
◆ 사법리스크 피하려면 사후관리도 삼성처럼

이 회장의 이번 1심 재판 결과는 향후 승계작업을 진행할 국내 대기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상장 계열사 간 합병을 추진하고 있는 셀트리온그룹이 대표적이다. 그룹은 지난해 말 셀트리온을 중심으로 셀트리온헬스케어를 1차 합병했고, 연내 셀트리온제약까지 흡수합병해 지배구조 개편을 단행하겠다는 계획이다.
 
재계는 이번 합병의 배경에는 경영권 승계와 이를 위한 지배권 강화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미 합병이 이뤄진 셀트리온과 셀트리온헬스케어의 경우 헬스케어 1주당 셀트리온 0.449262주로 비율이 적용됐으며, 주주 97%의 동의를 얻어 합병이 통과했다. 올해는 셀트리온제약에 대한 합병이 예정된 상황이다.
 
KG그룹 역시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그룹 내 핵심 계열사 합병에 돌입했다. KG그룹은 계열사 KG ETS가 KG모빌리티홀딩스를 흡수합병하면서, KG ETS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 지배력 강화 작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곽재선 KG그룹 회장의 장남 곽정현 사장은 합병 전 KG모빌리티에 대한 지분을 확대하면서 합병 후에는 케이지케미칼을 제외하면 개인 최대 주주가 됐다.
 
문제는 합병비율이다. 이 회장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그 비율이 시장의 분석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정해졌다면 향후 사법 리스크를 피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과거 사례에 비춰볼 때 법원은 합병으로 인해 주주와 회사에 손해가 간 것만으로도 배임 혐의로 인정한 경우가 있어 합병 이후 주가 관리도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꼽힌다.
 
실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경우는 합병 직후 삼성물산의 건설 부문 실적 개선 전망과 바이오산업 성장 기대감 등으로 인해 재상장 첫날 장중 4% 넘게 오르기도 했다. 이는 당시 국내 건설사들의 주가가 연간 최대 50% 이상 폭락한 것과 반대되는 흐름이다. 당시 글로벌 의결권 자문 기관인 ISS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무산될 경우 시장 상황 등을 반영해 삼성물산 주가가 22%나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두 회사의 합병이 결과적으로 주주이익으로 이어짐을 강조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한국에서 배임 혐의는 외국과 달리 회사와 주주의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경우 적용되는 사례가 많다”며 “삼성의 경우는 합병비율 산정부터 사후 주가까지 주주의 손해가 없다고 판단됐지만, 둘 중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한 지배구조 개편은 언제라도 사법리스크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삼성 사옥 모습 [사진=연합뉴스]